2022/08/24
소선영
대부분의 사람들은 높은 곳에 위치한 법에 압도 당해 두려움을 느끼곤 한다. 경찰이란 말에 들었던 주먹을 내리고, 고소라는 말에 쓰던 댓글을 멈춘다. 법은 그것들에 멈추지 못한 것을 나무란다. 곱셈을 배우던 시기에 엄마 손을 잡고 가 보았던 알라딘, 그곳은 누군가에게 한 장 한 장 넘겨졌었던, 새것이 아닌 책들, 즉 중고 책들을 파는 곳이었다.
중고라 함은 왠지 모르게 헌 것이라는 생각이 들곤 하지만, 난 오히려 헌 것이라 더욱 손이 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새로 출판되어 포장지 속에 먼지 한 톨 남기지 않은 빳빳한 새 책 보다도, 왜인지 모르게 사람의 손 때가 친근함으로 다가왔다.
책들 속에서, 난 오직 감과 표지의 디자인에만 이입 해 책을 골라 담았다.
그 책들 속엔 ‘최소한의 선의’라는 책 또한 담겨 있었다.
물건의 본질 보다도, 새로 나의 것이 된 물건을 살펴보는 것이 좋았고, 하얀 봉투에 담아 무사히 집으로, 내 방 책상으로 오게 된 책들 중 최소한의 선의라는 책을 집어 첫 페이지를 넘겼다.
제목부터가 나 심상치 않아라고 말하고 있던 책이었지만, 그 속내는, 나로선 도저히 범접하기 힘든 주제를 품고 있었다.
잠깐의 탄식 후 나는 다음 기회를 노리며 책장에 꽂아 넣었다.
“법이란 사람들 사이의 절대 넘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선(line)’인 동시에 사람들이 서로에게 베풀어야 할 ‘최소한의 선’이다.”
법이라 하면 벌써부터 눈알이 제 자리에 있을 줄 모르고, 머리는 누가 한 대 친 것 마냥 아파 오기도 한다.
손목에 수갑이 채워져 그 자리에서 연행될 만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경찰차만 지나가면 저절로 고개가 움찔 대곤 한다. 혹여나 음료를 먹으려 잠깐 내렸던 마스크가 걸림돌이 되진 않을까 하고 말이다. 칼을 든 정의의 여신상, 작두로 악인의 목을 성둥 자른 포청천, 여름에도 오한이 돋는 그 서늘한 이미지 때문인지,, 법은 자연스레 일상 속에서 멀리 하게 되는 것들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불운한 사회 탓인지, 혹은 그러한 사회에서 자꾸만 번식해 나아가는 열등감 탓인지, SNS는 점점 우월하다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썩 좋지 않은 감정을 표출해 버리는 감정 쓰레기 통이 되어가고 있었다. 때론 몸도 얼굴도 완벽한 멋진 강남 언니의 에르메스 백에 눈이 커졌고, 때론 땀냄새조차 향기로울 것 같은 요즘 가장 잘 나가는 아이돌의 청바지 핏에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여러 번 눈과 입이 부러움을 나타내자
그들을 비난하는 게시물들도 빈번히 보였다.
칭찬은 찾아볼 수 없는 글이었지만, 그 글의 좋아요 수는 쉴 새 없이 오르고 있었다.
댓글엔 열등감이냐는 말도 있었지만, 대댓글엔 진지충이라며 비아냥댔다.
그런 게시물도 여러 번 마주하니 점점 그 선망의 대상들은 더 이상 선망받지 못하며 비난을 받고 있었고,
사람들은 진지충이냐는 말을 듣기 싫어 숨어버렸다.
여러 방면의 다양한 사상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가장 많이 접하는 곳이 바로 SNS이기에, 사소한 것들로부터 사회적 이슈가 되는 것들까지 꽤 다방면의 주제들로 서로서로가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맞닿아 충돌하기도 한다.
포도 한 송이 속에 함께 영양분을 공급하고, 자라난다 해도, 그 포도 한 알 한 알의 크기의 차이, 세세한 색의 차이는 존재한다. 그렇기에 포도 한 알마다 맛의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것처럼 사회에서 다른 사상과 의견은 존재할 수밖에 없고, 그 가운데 법은 최소한의 선의라며 발열된 분위기에 일어날 수 있는 불상사를 막고 있다.
‘선의’라는 단어를 포함해 모든 단어가 그렇듯 늘 복잡하다. 심지어 음료수처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주 활용하는 단어조차도 그 속엔 모두 깊은 뜻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나는 선의라 생각해 기껏 상대에게 했던 행동도, 상대에게는 쓸데없는 오지랖, 부담스러움, 등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 때문인지 사람과 사람 간의 선의는 꽤 주관적이라 생각된다. 몇 주에 한번, 한 달에 몇 번, 꽤 철든 것만 같은 선의를 베풀기 전에 나의 선의를 한 번쯤 의심해 보곤 한다. 혹여나 내가 오지라퍼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쓸데없는 참견은 아닌지,.. 늘 결론은 평소처럼 행동하자며 주머니 속 손을, 마음속 선의를 쉽게 내보이지 않는다.
몇몇 사람들은 말한다.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 줄 아냐며 왜 함부로 도우려 드냐며, 갖가지 말들로 자신의 칼 같은 냉정함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가끔가다 보이는 허름한 옷에, 500원 여러 개가 들어있는 상자를 들고 계시는 아저씨들, 폰과 한 몸이 되어버린 많은 사람들은 그 아저씨를 외면하여, 고작 5초 남짓 남은 신호 등불에 뛰어가기 일 수 지만, 간혹 가다 마주치는 몇몇의 사람들은 뛰어가는 사람들 사이에 멈춰 상자 속에 자신의 지갑의 돈을 넣곤 한다.
나도 꼭 저런 어른이 되겠다며 다짐했지만,
그 사람의 지폐는 나의 눈에나 선의로 보였던 것인지,
대여섯의 아이들 사이에 한 친구는 오지랖이며 하나의 위선과 같다고 말했다.
잠시나마 선의라고 했던 내 생각을 속에서만 그쳐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
하지만 철저한 완벽주의자의 뇌 속에나 존재할 것만 같은 법이라는 한 글자는 이러한 사람들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의라 말한다.
꽤 간단하다. 법은 우리가 지켜야 할 선이며 베풀어야 할 선의라는 것이다. 여러 책이나 방송에서도 나왔듯이, 법은 하나의 약속이라고 한다. 나는 사회, 그리고 70억 인구와 약속했기에 새로 출시될 아이폰 14가 갖고 싶다고 지나가는 행인의 가방을 뺏어 그야말로 경찰서에 연행될만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친구 한 명과 치킨 한 마리를 먹어도 딱 맞춰 두 개인 닭다리를 내가 독식하고 싶어 잔머리를 굴리는데,, 여기저기 깨진 내 휴대폰과 대비되는 신형 휴대폰이 얼마나 탐나겠냔 말이다. 그러한 나에게 아빠는 미션 하나를 내주셨지만, 그 미션을 듣자 굴뚝같았던 나의 물욕은 찬물을 끼얹은 듯 잠잠 해지고 말았다.
아빠는 사주지 않으시겠단 말을 그저 조금의 희망을 담아 돌려 말하신 것뿐이었다.
인간은 본래 특출 난 무언가가 있기에 존엄하다기 보단, 서로가 오랜 분쟁 끝에 서로를 존엄하다고 인정하자고 한 것 이기 때문에, 메마른 모래로 쌓은 탑처럼 꽤나 얕은 신뢰와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 위에 법은 모두가 존엄하다고 하기에 법, 그 아랫사람들은 최소한의 도덕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다.
선하며 도덕적인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악하고 도덕적이지 못한 사람들 또한 존재한다. 까다로운 기준 속에 선하며 도덕적인 사람들만 모아놓은 나라가 있다 해도, 분명 그 속에서 자신의 사회적 위치, 가족이란 형태가 존재하는 한 반드시 생겨날 수많은 비리와, 낙하산 등으로 그 나라에 부당함과 공정하지 못함에서 존엄하지 못한 행위를 저지르는 사람들 또한 비일비재하게 생겨 날 것이다.
정치인들 중 자신의 자녀의 미래를 위해 뇌물과, 권력을 이용해 많은 비리를 저질러 검찰 조사를 받곤 하지만,
자신의 안위를 위해, 혹은 자녀의 평화로운 삶을 위해 들키지만 않으면 될 것이라는 흑심으로 얼마든지 도덕적이지 못한, 뇌물, 낙하산, 비리는 멈출 줄 모르고 생겨날 것이다.
그렇기에 분명 상식적이지 못한 행위를 하는 사람과, 추악한 범행을 저지르는 악인들 또한 있는지 모르게 우리 곁에 존재한다. 혹시 모르는 것이다. 낮에 버스를 기다리며 앉아 있었던 버스정류장 의자에 그 악인도 함께 앉아 있었을지,
뉴스에서 앵커가 보도하는 악행 또한 누구도 모르고 스스럼없이 일어났을 것이다.
사람들은 키보드를 치며 손가락으로 그 범인을 욕하고,
손가락으로 피해자를 추모한다.
그 범인에게 떨어진 터무니없는 형량에 또 한 번 손가락으로 분노한다.
법은 최소한의 선인 동시에 최소한의 악이라 말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뜻인 공리주의와, 인간의 가치를 주된 관심사로 삼는 사상인 인본주의 이 두 개가 대한민국의 법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이기에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사실상 사형이 집행되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라 한다.
최소한의 선, 최소한의 악,
모두의 기준과 평판, 그리고 가치관은 다르기에 저 두 키워드를 받아들이는 시선 또한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세 번의 기회를 주는 것이 합당하다 생각할 테고, 다른 누군가는 두 번의 기회도 충분하다 말한다.
하얀색이 아름답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검은색이 아름답다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얀색, 검은색으로 분쟁 중인 사람들은 저 주제가 중대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제삼자인 우리들은 개개인의 취향이 아니냐며 의문을 표한다.
그런 우리의 말에 하얀색 검은색으로 분쟁 중인 사람들은 어쩌면 이도 저도 아닌 말이라며 비아냥댈 수도 있다.
최소한의 악 최소한의 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모두의 적당한 불편함이 아닐까 싶다.
A 무리의 의견을 들어준다면, 분명 B 무리의 사람들은 부당함을 토로할 것이다. 아주 조금이라도 어느 한 곳에 치우친다면, 사람들의 불만은 하늘 가까이 올라갈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선과 악엔 최소한이라는 단어를 붙인 것이다.
종교나 인종 등등 인간을 구별 지을 수 있는 모든 항목을 제외한 채 오직 인간이라는 하나의 항목에만 집중해 악과 선을 만든 것이다.
만약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특정한 혜택을 받게 된다면, 동양인을 제외한 다른 인종들은 불만과 부당함을 주장할 것이라는 말이다.
가끔씩은 인간이 존엄하다는 말에 의문을 같기도 한다.
동물의 왕국에 나오는 동물들도 자신의 동족을 해치진 않는다.
하지만 그리 존엄하다 말하고 칭하는 인간, 그 인간들 중 몇몇은 자신의 동족도 스스럼없이 해하곤 한다.
어쩌면 법이라는 것이 사라질 때 인간은 그제야 존엄해 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