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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육면체

by 제이티

2022.9.30.

서가연


1, 2학년 때는 한 해가 지나서 학년이 올라가고 반이 바뀔 때면 새롭다는 생각에 마냥 좋기만 했다. 하지만 4,5,6부터는 새 학기 때 반에서 은근한 긴장감이 돌았다. 1학년 때처럼 개방적이게 반 친구들과 다 같이 어울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 배정이 망하면 세상이 망한 듯했고 ‘친구 없는 찐따 되면 어쩌지?’라는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4학년부터는 흡사 조선시대처럼 신분이 정해진다.


‘째는 찐따네 어울리지 말아야지, 나도 찐따 되기 싫으니까’ ‘째는 친구 많네 째랑 놀아야지’ 그러기에 새 학기 에는 찐따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개학 전날 비장하게 친구 사귈 준비를 하며 개학날 알지도 못하는 친구에게 갑자기 마이쮸를 주며 가식적인 미소를 선보인다. 나는 나 자신이 생각해도 차별이 심하다고 생각한다. 그냥 첫인상부터 싫은 애는 무슨 일이 있어도 평생 싫다. 하지만 새 학기만큼은 그 차별 끼를 빼고 등교를 한다. 그리고 착한 척을 한다. 이미지를 평소 나와 너무 다르게 잡는다.


하지만 그게 나에게는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그게 진정한 친구든 아니든 그런 식으로 친구를 사귀었다. 친구가 잘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쿨한 이미지를 가지기 위해 그냥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고 친구와 더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이름도 모르는 학원을 등록하고 무슨 색 인지도 모를 옷을 예쁘다며 칭찬하고 나는 그럴 때마다 스스로 자책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고 내가 하고 싶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럴 때마다 내가 달라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다르게 말하면 내가 쓰고 있는 가짜 내 모습의 가면이 두터워지는 것을 느끼고 있다.


스파이더맨 같은 초능력자가 나오는 영화를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내 내면에는 저런 모습이 숨겨져 있지 않을까?’ 무언가를 원할 때마다 나는 지금 내 모습이 아닌 깊은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진짜 내 모습을 찾으려고 한다. 근데 더 생각을 하다 보면 갑자기 생각을 하기 싫어진다. 진짜 내 모습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가면보다 볼폼 없을 수 있으니까. 친구가 내 옷에 음류수를 쏟으면 욕 하는 게 내 본성이고 나다, 하지만 기회비용을 따지면 내가 욕을 하며 본모습을 보였을 시 좋은 대가가 올 일은 없다 그저 욕 많이 하는 년 이라며 뒤에서 까일 뿐이다. 그러기에 나는 다시 가면을 쓰며 괜찮다며 넘기는 것이다. 처음 태어나서부터 예의라는 것이 갖춰져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안녕하십니까?” 하는 아기가 있는가? 태어나면 그저 세상 물정 모르고 울어대고 재밌으면 웃고 배고프면 다시 울 뿐이다. 하지만 크면서 세상의 법과 규칙, 예의라는 것에 응축돼 내 본성이 누군가를 치는 거래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갑자기 세상에 법, 예의라는 것이 사라진다면 나는 계속해서 던지고 부수고 욕을 해댈 것이다. 그게 아마 나의 본모습일 테니까 하지만 내 주변 사람들 중에는 내가 부수고 욕을 해대도 곁에 남아 줄 사람은 없다. 그럼 나는 삶을 고독하게 살아야 한다. 고독은 만화에 나오는 ‘가을의 고독한 남자’처럼 멋진 것이 아니다. 매일 혼밥을 하고 뒤에서 까이며 혼자의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내 눈 에는 불행해 보이는 사람이다. 나는 불행하지 않기 위해 나의 진짜 모습을 스트레스에도 불구하고 가면 뒤에 숨기는 것이다. 왜냐면 사람들은 내가 가면 쓴 모습을 더 선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선 사람들이 보고 싶은 면 만 보여주어야 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해주어야 한다. 사람들이 손흥민 선수가 꼴을 넣지 못하면 욕을 하고 꼴을 넣으면 환호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내 본모습은 묻어져 가도 나의 편의를 위해 무대 위에선 배우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무대는 어디에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의 진짜 모습은 짓밟혀 가는 것이다. 내가 가면을 쓰는 이유는 어쩌면 더 나은 결과를 선택하려는 기회비용이 아닌 어느 걸 선택하든지 결과를 치러야 하는 매물비용 쪽에 가까울 수 있다.


내가 진짜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면 혼자가 되어 자유롭지만 외로운, 벽돌로 쌓아 틈 없는 곳에 혼자 갇혀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가짜 나의 모습으로 가면을 쓰고 살아가면 사람들이랑 어울려가며 내 본능이 아니어서 스트레스지만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살아갈 수 있다. 나는 따뜻한 온기를 느끼는 쪽을 선택했지만 내가 행복하다고는 당당히 말하지 못할 것 같다.


나에게는 소중한 친구 2명이 있었다. 그 2명도 가면을 쓰고 만난 친구다, 나는 요즘 들어가면을 느슨하게 쓴다. 그렇다고 막 뭐 던지고 막무가내는 아니지만 전에는 못 했던 할 말은 하고 산다. 예를 들면 그 친구 2명은 장난이지만 내가 듣기 거북한 말들을 많이 했다. 근데 내가 거기서 갑자기 정색하면 거리가 멀어질까 봐 그때는 같이 억지로 웃었지만 지금은 똑같이 말해 되 갑아 준다. 나도 그저 장난일 뿐이었던 더러 그 2명의 친구는 나에게 “너 변했어”라는 말을 가장 많이 했다. 그리고 “나쁜 년”이라는 말도 두 번 째로 많이 했다. 나는 그 2명의 친구 중 1명의 친구를 잃었다. 나는 찌질 하게도 그 친구에게 미련이 남아 매일 내가 뭘 잘못했을까?를 생각했다. 엄마는 그저 ‘누구나 너를 좋아할 수만은 없어’라며 미련을 남기지 말라고 하셨다. 하지만 분명 이상했다. 분명 친했는데 우정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종이 찢기 듯 찢겨버렸다. 그 친구는 그저 내가 가면 쓴 모습을 좋아하는 친구 일 뿐이었다. 내가 가면을 쓰지 않자 그 친구는 떠나 버린 것이었다.


근데 반대로 생각을 해보면 나는 그 친구의 내면까지 알고 있지는 않기에 그 친구도 가면을 쓰며 노력했는지 아닌지를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의 대부분은 진짜 나를 우월하게 생각하지 않기에 가면을 쓰고 다닌다. 솔직히 말해선 나도 지인의 모습이 바뀌어버린다는 것을 찝찝하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바뀐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해 떠난 친구를 못됐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막상 나와 같은 심리였던 것이다.


지금은 어느 정도 내 인생에서 나가 줄 사람 한 명 걸렀다고 생각하지만 나에게는 큰 변화가 왔다. 나는 학교를 가기 전 쿠션 같은 간단한 화장을 연하게 한다. 원래는 아침에 운 좋게 시간이 남았을 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매일 하게 되었다. ‘쌩얼로 내 본모습을 보이면 갑자기 남자 친구가 헤어지자고 하면 어쩌지?’ 하는 내 진짜 모습을 보이면 누군가가 떠날 것만 같은 불안감과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렇게 가면의 용도는 편리에서 불안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책과 종종 보이는 짤막 짤막한 유튜브 강의들을 보면 자기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아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외국 위인 중 한 분인 테스(?)를 보면 나 자신을 알라는 명언까지 남기셨다. 나는 그런 것 들을 보며 나의 진짜 모습이 주변에 불빛이 없어야 환하게 눈앞에 나타나는 별처럼 빛날 줄 알았다. 하지만 양면 종이는 그냥 양면 종이 일 뿐이고 입체도형은 그냥 입체도형일 뿐이다. 한 면이 노란색인 종이 뒷면에 갑자기 별처럼 빛나는 빛이 있다거나 빠져드는 우주가 있다는 것은 꿈일 뿐이다. 더군다나 사람은 자신이 국어시험 100점 맞고 수학시험 10점 맞으면 국어시험 점수만 언급하듯 좋은 면만 보이려고 하기에 뒷면인 진짜 나의 모습에 빛이 있다는 건 그저 희망일 뿐이었다. 테스 그 위인은 그저 자신의 모습을 알고는 있으라는 것 같다.


솔직히 나는 내 진짜 모습을 모르겠다. 학교에서는 그저 그렇고 학원에서는 활발했다가 어떤 학원에서는 또 소심해지고 집에 있으면 말 수가 줄어들고 나의 모습들은 마치 다른 각도에서 찍은 사진들처럼 다 다른 모습이었다. 그 여러 모습들 중에서 진짜 나를 찾으라는 것은 같은 가방들 중에서 외관만 보고 자신의 가방을 찾으라고 하는 것처럼 어렵다. 나 자신은 자기 자신이 잘 안다고 했다. 내가 뭘 하며 시간을 보냈고 내가 무슨 옷을 입고 친구랑 놀았고 내가 무슨 음식을 먹으며 배를 채웠는지 다 알고 있다. 근데 정작 내 진짜 모습이라는 간단해 보이는 의문마저 소화되지 않는다. 근데 내가 누구냐 물으면 각각의 모습은 설명할 수 있겠지만 진짜라는 것은 이미 가짜들에 묻어져 없는 걸 수도 있다.


나의 몇몇 친구들은 자기는 한결같은 사람이 좋다고 했다. 나도 한결같은 사람이 좋고 되고 싶다. 내가 실수를 해도 용서하며 다시 한결같은 사이로 지내게 되고 좋지 않은 소문이 돌든 말든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일직선 인 사람. 근데 이런 사람이 세상에 있기나 할까? 사람은 여러 가지의 모습이 있는 것이고 그 여러 가지의 모습은 언제든 쓰이기 마련이다. 안 좋은 일에 엮이면 호의적으로 굴던 친구가 악의적으로 굴 수도 있는 것이고 계속해서 장난을 웃으며 받아주던 친구가 어느 날 폭발해 화를 낼 수도 있는 것이다. 한결같다는 건 아몬드 책의 재윤이 같은 친구에게서 찾아야 될 것 같다. 그리고 한결같은 사람을 찾기 전에는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것이 옳은 선택 같다.


<울고 싶은 나는 고양이 가면을 쓴다>라는 조금은 씹덕이지만 일본 애니가 있는데 내용이 대충 사사 사키 미요라는 한 여학생이 히노데 겐토라는 남학생을 짝사랑하고 고백하지만 매번 거절당하자 우연히 고양이 가면을 사게 되고 그 가면을 쓰니까 고양이가 되어 그 가면을 쓰는 동안은 자신이 좋아하는 (히노데 겐토) 남학생에게 고양이 상태로 사랑을 받게 되자 자신이 인간일 때의 진짜 모습보다 가면을 썼을 때인 가짜 모습 고양이인 모습을 더 좋아하다가 대충 뭔 일이 일어나는 그런 영화인데 이 주제와 맞는 것 같아 언급을 해 보았다.


누구나 자신의 모습보다 아이유의 모습이 더 멋져 보이고 아이유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멋지게 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옷을 따라 사보고 화장도 비슷하게 하고 목소리 톤도 비슷하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거울 속에 비친 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는 추한 모습이었다. 그다음 나는 다른 사람도 따라 해 보았고 다른 스타일도 따라 해 보았다. 하지만 추한 건 똑같을 뿐이었다.


솔직히 나는 내 뒷면에 무엇이 있는지를 모르겠다. 그저 양면 종이를 본떠 짐작할 뿐이다. 나랑 사이가 안 좋은 친구가 있다. 내가 어쩌다 그 친구가 선생님한테 “선생님이 안 계셔야 본성을 들어낼 텐데”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나를 향한 말이었다. 나는 그 친구가 말한 나의 본성에 대해 아직도 생각 중이다. 나의 본성이 뭔지를 잘 모르겠다. 나는 원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나를 살짝 손 본 것뿐이다. 나 자신을 알고 사랑해야 행복하다는 자기 사랑 교육을 학교에서 몇 번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수업은 빛만 말하고 그림자는 말하지 않고 있다. 내가 내 진짜 모습을 사용하며 사랑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 에게는 사랑받을 수 없다. 나의 진짜 모습이 뭔지 모르겠지만 아마 사람들이 원하는 것처럼 둥글지도 투명하고 맑지도 않을 테니까.


내 생각에는 진짜 나를 찾으려 면은 ‘너는 뭐를 하고 싶어?’라는 간단한 질문은 충족하지 못할 것 같다.


자신을 알아야 행복하다는 강의가 아무리 좋은 강의들이라고 해도 나는 나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가면을 쓰며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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