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4. 서가연
나에게는 4살 많은 사촌이 있다. 그 사촌에 집에 가면 거실에 몇 개의 책장들이 있는데 책장들은 모두 빽빽이 책들로 채워져 있어 분위기부터가 뭔가 공부를 해야 할 것 만 같았다. 책의 조금의 흥미가 있는 나는 갈 때마다 책을 한 권씩 펼쳐보곤 한다. 하지만 어려운 글자들이 내 뇌를 덮쳐 항상 얼마 안 가 덮어버리기 마련이었다. 며칠 전 사촌이 책을 주겠다고 제한하였고 피겨와 인형으로만 채워져 있었던 나의 선반에 책들이 가득 차게 되었다. 아직 다 읽지는 않았지만 책들이 꽂혀 있는 책장만 봐도 알 수 없는 뿌듯함이 나를 덮쳤다. 몇십 권의 책 중에서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두 권의 책이었다. 장발장과 동물농장 나는 둘 중 무엇을 읽을까 하다가 예능으로 인해 익숙한 제목인 동물농장을 집어 들었다. 책을 펼치니 동물 이야기가 나와 ‘너무 어렵지 않을까?’ 하는 내 불안한 마음이 어느 정도 안심을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동물이 나온다고 아기돼지 삼 형제처럼 단순하지는 않았다.
동물들이 노동에 휘둘리는 한 농장이 있었다. 어느 날 밤 동물들은 한 곳에 모여 메이저 어르신 돼지의 연설을 듣는다. 메이저는 달걀을 빼앗기고 매일 노동하는 삶이 익숙하겠지만 그건 정당하지 않으며 자신들이 너무 불공평하고 권리가 지켜지지 않음을 말하고 인간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했다. 몇몇 동물들은 메이저의 말에 귀가 솔깃했지만 다른 몇몇에 동물들은 갸웃하기만 할 뿐이었다.
내가 tv에서 어떤 한 예능을 보다가 한 광고를 보게 되었다. 어떤 치킨 광고였는데 광고에 동물복지 인증을 받았다며 홍보를 했다. 나는 그 동물 복지 인증이라는 말에 머리에서 물음표가 떠올랐다. ‘어차피 치킨이면 죽어서 우리 배속으로 들어가는데 복지 할 필요가 있을까?’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가끔 유튜브 알고리즘에 ‘인간들의 호기심으로 인한 잔인한 동물실험’ ‘잔인한 음식 제조과정’ 이런 영상이 뜬다. 나는 호기심으로 인해 영상을 클릭한다. 그 영상에는 토끼에게 화장품 실험을 해 토끼 눈이 빨개진다 던가 오리 간 요리를 위해 눈알을 뽑고 먹이를 억지로 주입시켜 간을 크게 만든다 등등 상상하기도 끔찍한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댓글이나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잔인하다는 등 비판들이 쏟아지곤 한다. 나도 사람들과 같은 반응을 하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이런 영상을 보고 비판할 수 있는 건 채식주의자뿐이 아닐까? 동물학대를 보고 분노를 하지만 정작 잔인하게 목이 꺾여 죽고 찔려주고 털 뽑아서 튀긴 치킨을 저녁으로 먹고 있지 않은가? 동물실험과 동물을 먹으려고 죽이는 것과 제조과정의 차이는 있지만 똑같이 잔인한 것이라고 느낀다.
나는 막상 고기를 잘 먹지만 육식을 한다는 것이 그닦 좋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생태계 피라미드라는 것을 만들어 밑의 계급이 희생되는 건 당연하다는 듯이 표현하고 있지만 동물은 자신의 인생을 살려고 태어난 것이지 사람들의 식탁 위에 올라가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어른들이 부지런하라는 의미에서 ‘일찍 이러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라는 속담을 쓰신다. 하지만 새에게 먹히는 벨레는 먹히기 위해 일찍 일어난 것이 아니지 않은가? 결국 벌레는 벌레라는 밑에 계급으로 인해 억울하게 새에게 잡아먹히는 것이다. 나의 입에서 희생되는 치킨도 이 벌레와 같은 사정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잡식임에도 불구하고 맛있다는 이유로 풀 말고 고기를 더 당겨한다. 몇몇 동물들은 사람들의 입에서 재미를 준다고 희생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희생된 동물의 장례조차 치러주지 않는다. 불쌍하다의 기준은 자신의 욕구 선에서 필요하나 팔요 하지 않나의 차이인 것 같다.
다시 책 내용으로 돌아가 보자면 메이저의 연설을 듣고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농자의 일꾼들이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는 것을 잊어버리게 되고 최소의 권리인 먹이를 잃은 동물들은 우리에서 나와 식량이 있는 창고를 뚫고 식량들을 어김없이 먹어버린다. 그 광경을 목격한 농장주인 존슨과 일꾼들은 ‘감히 인간들이나 열 수 있는 식량창고에 손을 대다니, 동물 주제에’라는 생각으로 동물들에게 위협을 주지만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가버린 동물들은 일꾼들과 존슨을 농장 밖으로 쫓아내 버린다. 어떨 결에 동물들이 반란을 성공해 낸 것이었다. 돼지인 스노볼은 벽면에다가 모두 다 같이 지키자며 7 계명을 써놓는다. (두발은 나쁘고 네발은 좋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등 등) 어쩌다 똑똑한 머리로 인해 지도자가 된 스노볼은 농장의 이름을 동물농장이라고 칭하며 휴일을 만들고 회의하는 날을 만들며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농사를 할 때 동물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점을 지도해주었다.
동물들은 인간이 없는 생활을 만끽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존슨 일당이 농장을 쳐 들어와 동물들과 전투를 하였고 동물들의 승으로 끝나 동물들은 외양간 전투라고 칭한다. 여기 동물농장의 동물들 중 몰리라는 한 말이 나온다. 마차를 끄는 용으로 쓰이던 말이었고 마차를 끄는 말이니 사람들의 눈길을 받게 돼 존슨은 몰리를 공들여 꾸며주고 예뻐해 줬다. 그래서 몰리는 메이저가 하는 말에도 인간의 손길을 받으며 자랐기에 이해를 하지 못 했다. 결국 몰리는 반란을 일으킨 후에도 사람들 앞에서며 사람들과 교류를 해 동물농장에서의 동물로 취급되지 않았다. 세상에는 두 가지의 동물 부류로 나눠져 있다.
한 가지의 부류는 사람들의 손길에서 사랑을 받으며 자라는 동물이고 다른 한 가지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거나 희생된다. 사랑을 받는 동물들 중에서는 흔히 강아지와 고양이가 있다. 강아지는 개고기 때문에 어느 정도 타격이 있지만 흔하지 않기에 포함시킨다. 금붕어 같은 경우는 같은 물고기임에도 고등어처럼 사람들의 밥상의 오르지 않고 어항이라는 유리 안 속에서 사람들에 사랑(?)을 받는다. 나는 어쩌면 사람도 똑같다고 생각한다.
같은 땅을 밟고 있는 사람이지만 흑인이라고 차별을 받는 사람이 있고 부모를 잘못 만났다는 이유로 숨지는 아이도 있으며 반대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가 있으며 하루에 노동하고 고작 몇 백 원을 받는 사람이 있지만 그와 정 반대로 일주일에 몇 억을 받는 사람도 있다. 사람은 다양하다고 표현할 수 있겠지만 사람이 받는 취급이 다르다고도 표현할 수도 있다. 몇몇 사람들의 차별 때문에 쓸 때 없이 희생자들이 생겨난다. 노 키즈존 때문에(이유는 있지만) 누구는 들어갈 수 있으며 누구는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세상은 평등하다고 하지만 이 책의 몰리라는 동물이 나온 것처럼 마냥 빳빳하지는 않다.
다시 책의 내용으로 돌아가 보자면 동물농장의 동물들은 일요일마다 회의를 한다. 식량문제, 존슨 일당이 다시 쳐들어오면 어쩌냐 등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건데 여기서 의견을 내는 것은 돼지들뿐이었다. 다른 동물들은 투표만 할 뿐이었다. 의견을 내는 돼지들 중 유력 한 건 스노볼과 나폴레옹이라는 두 돼지가 있었는데 두 돼지의 의견은 자꾸 반대를 향해 충돌할 뿐이었다. 현대로 치면 이제명과 윤석열 대통령 급이다. 스노볼이 의견을 내면 나폴레옹은 무조건 반대라고 잡아 땠다. 하지만 토론에서는 반대보다 찬성 측이 유리하듯 늘 스노볼의 의견을 따르곤 했다. 나폴레옹은 그런 스노볼을 못 마땅하게 생각했고 은밀하게 새끼 개들을 훈련시킨다. 시간이 지나고 스노볼은 전력을 만들어 쉽게 생산하기 위해 풍차를 건설하자고 의견을 냈다. 나폴레옹은 역시 스노볼의 의견에 반대 의사를 보인다.
하지만 스노볼이 의지를 쉽게 굽히려고 하지 않자 나폴레옹은 훈련시키던 개들을 불러 모아 스노볼을 농장에서 쫓아낸다. 스노볼을 쫓아낸 나폴레옹은 독재정치를 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의견의 반대의사가 있으면 개들로 위협을 주고 죽이기까지 하며 갑자기 풍차 건설을 추구하고 태풍 때문에 허무하게 풍차가 무너지자 스노볼 때문이라며 스노볼을 적으로 만든다. 지금으로 보면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 욕했는데 대통령은 끝까지 사과 안 하고 언론을 잘못 보도 한 방송국의 잘못이라고 잡아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도 잘못한 것을 인정하는 걸 싫어한다. 그냥 자존심이 상한다. 그렇다면 대통령은 자신이 잘 못 한 것을 인정한다면 자신이 무력하고 띠딜 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인데 마냥 쉽지 만은 않을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한 잘못에 책임을 지는 것은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다시 책 내용으로 돌아가 보면 동물농장에서 가장 열심히 노동을 하던 복서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아파서 병원에 보내주는 척하고 도살장에 팔아 돈과 바꾸었다. 그리고 돼지들은 7 계명을 마음대로 바꾸어가며 사람들처럼 생활을 하고 두발로 걷고 술을 마시고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며 풍족하게 삶을 살아간다. 그와 반대로 직접적 노동을 한 다른 동물들 에게는 밥도 제대로 주어지지 않고 있었다. 끝은 그렇게 꺼림칙한 엔딩으로 돼지들은 사람처럼 되고 그 옆에 사람들은 돼지처럼 되며 끝이 난다. 동물들은 자신의 권리라는 것을 지키기 위해 인간들과 맞섰지만 막상 독재라는 것을 또 반복하고 있으니 인간을 이겼다는 왠지 모를 뿌듯함은 있겠지만 막상 자신의 삶은 더 비참하고 초라해질 뿐이었다.
그와 반대로 돼지들은 똑똑 하기에 독재정치를 할 수 있게 되고 사람 같은 풍족한 삶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근데 과연 돼지들은 똑똑하다는 이유뿐으로 독재를 할 수가 있었을까? 그렇다면 스노볼은 왜 동물농장에서 쫓겨나게 되었을까? 독재를 하려면 약간의 머리와 노력도 필요하지만 결국 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싸울 때 아무리 말 빨이 세더라도 주먹 한 방 이면 날아가는 상대이다. 하지만 나는 교과서로 박정희와 전두환 등 시절을 배웠기에 독재정치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알고 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희생을 당하고 아무리 생산을 늘어도 수요가 늘지 않는 많이 잔인한 그런 상황을. 나는 박정희, 전두환 배울 때 솔직히 ‘다 같이 그냥 공평하게 살면 되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동물농장의 나와 있는 것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허우적허우적 하지 않기 위해서는 한 명이 정권을 잡아야 하며 정권을 잡고 있는 사람이 언제 권력에 취해 독재를 할지도 모르고 누가 그 자리를 넘보고 있을지 모른다. 몇 명의 똑똑한 사람들은 높은 자리를 원 한다 그러기에 조선시대 배울 때 쿠데타라는 단어를 몇 번 접하는 것이다. 나 또한 내가 학생이 되어 선생님의 말을 따르는 것보다 내가 선생이 되어 학생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을 더 경험하고 싶다. 그러기에 독재가 아예 없이 깨끗하다는 건 어려운 소망 일 뿐이다. 한국의 바로 윗 나라인 북한도 독재이지 않는가?
내가 이 책에서 독재 다음으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돼지들이 사람처럼 행동하였다는 것이다. 돼지들은 지금 시대에서 AI와 인공지능과 빗대어 볼 수 있다. AI반려동물, 전투로봇 등 사람이 하지 못하는 것에 도움을 주고 사람의 욕구를 채워준다. 지금은 사람의 뇌와도 같은 것이다. 자연인이 아닌 이상 없으면 살 수 없는 급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인간도 아니면서 감정을 느끼는 로봇의 발언 논란 등이 있듯 곁에 두기는 하지만 언제나 총을 드며 손절할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 이기도 하다. 하자만 갑자기 AI를 없애자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멈추자는 것도 받아들일 의견이 아니기에 무섭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핸드폰이 없으면 어떻게 배달을 시켜먹고 어떻게 인스타를 보는가? 편리를 위해 서라면 결국 인간보다 훨씬 우월한 인공지능 애개 인간은 끝을 보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나는 노력의 결과는 언제나 투명하고 정당하게 올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책의 복서의 비참한 꼴을 보니 노력보다는 머리가 똑똑해 권력을 지고 비열한 노력을 한 채로 나폴레옹처럼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