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0.29 백지원
전에 가족과 여행을 떠났을 때, 마트 앞에서 큰돈이라고 생각했었던 천원이 떨어있는 것을 보고 그 누구보다 빠르게 그 돈을 주워서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설탕 덩어리 도넛을 사 먹은 기억이 있다. 아무리 2000원을 더 내고 샀다고 해도 마냥 맛있게 먹을 뿐이었다. 내가 그렇게 돈을 빨리 주웠던 이유는 요즘은 청원이라는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없다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 돈으로 작은 하리보 젤리도 사 먹을 수 있고, 목구멍이 따가운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아이 셔도 먹을 수 있다. 이렇게 많은 것들을 살 수 있는 천원이 벽돌 길에 떨어져 있다면 당연히 덥석 먹을 것이고, 천 원을 준다고 해도 “아싸 공돈.” 하며 받을 것이다. 그런데 이 돈을 집었을 때, 같은 친구는 5천 원이라는 5배의 돈을 가지게 되면 천원은 쥐구멍보다 못한 신세가 되어버린다. ‘이걸 집어야 하나’
최후통첩 게임이라는 것은 예를 들어 내게 만원이라는 돈을 주고 옆의 친구와 나눠가지라며 돈을 주고, 내가 만원이든, 10만 원이든 직접 배분하여 나눠가지는 것을 얘기한다. 하나 단점이 있다면 친구가 만약 고개를 양옆으로 휘젓는다면 그 만원이라는 돈은 마치 잡으면 사라지는 연기가 되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우선 당연히 남에게 많이 주어야 돈이 오지만 나는 돈을 직접 배분한다면 당연히 내가 가장 많이 가지고 싶을 것이다. 50대 50으로 나눠야 공정하다면 70대 30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적게 가진 것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고, 한마디로 욕심이 생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인간의 욕심이라고도 하니 말이다. 천사와 악마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한다. 이런 말이 왜 생겼을까 생각해보면 선한 마음도 욕심이 한번 생기면 이성을 놓아버릴 수밖에 없으니까 하는 말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인터넷에서 욕심에 대해서 그린 그림을 본 적이 있었다. 당연히 문구도 밑에 써져 있었다. “10%만 줘버릴 걸” 수익을 속여 결국에는 그 거짓을 들켰을 때마저 욕심이 선을 넘어버렸던 것이 조금은 섬뜩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은 잘 안 변한다는 말이 있는 만큼 어쨌든 우리의 내면도 이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 나도 처음 최후통첩 게임을 접했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 그 친구에게는 내가 받은 금액을 속여 더 적게 얘기한 다음에 더 많이 준 것처럼 속이면 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다시금 들키더라도 그 전 시간까지는 그 즐거움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믿는 도끼한테 발등 찍힌다는 말이 다시금 와닿는다.
하나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로 ‘믿는’ 이 들어간다. 결국 신뢰가 존재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최후통첩 게임은 어쩌면 믿음을 주제로 실험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나는 늘 내 친구에게 믿음이라는 씨앗이 심어지면 그것이 자라서 뿌리는 어떻게든 그 친구를 의심하지 않기 위해 쓰는 변명거리를 만들어 자라난다. 친구가 갑자기 인스타 팔로우를 취소한다고 했을 때도 그랬다. 시간만 남으면 들어간 앱이 인스타이기 때문에 나에게 팔로워라는 숫자는 그 누구보다 중요했었다. 개인 사정이라고 했던 그 말만 몇 개월이 지난 지금도 아득히 생각난다. 하지만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게 된 듯하다.
그냥 뭔가 믿음이라는 뿌리가 너무 단단히 고정된 느낌이었다. 변명거리를 스스로 만들어 낼 만큼 그것이 믿음인 만큼, 돈을 줘야 하는 친구가 만약 나를 믿는다면 그 불공정한 배분에도 고개를 양 옆으로 흔들지 않고, 그저 “알겠어.” 이 한마디를 말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이런 친구인 만큼 더 마음 약한 모습을 보이며 불공정한 방법을 당당하게 내놓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과연 나를 믿는 친구가 몇 명일 까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 친구를 잃으면 내숭 속에 찌들어 있는 친구만 만나며 썩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우리는 체육시간에는 늘 밖에 나가 체육관으로 이동한다. 내 친구가 갑자기 감탄사인지 환호성인지 모를 소리를 질러댔다.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돈이라고 하던가, 그 친구는 바닥에서 웬 비너스를 보는 마냥 천 원을 바라봤다. 그래서 손에 쥐어진 천 원에 그리 신이 났던 것이었다. 하나 주변에 있던 애들도, 물론 나도 그리 같이 환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보였다. 영혼 없는 말만 툭툭 뱉었는데도 그 친구는 자기가 어떻게 보이는 지도 모르는지 마냥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고 있었다. 분명히 내가 걔보다 앞에 있었는데도 어째서 그 돈을 보지 못했는지 속으로 탄식을 뱉어냈다. 내가 그 돈을 주웠어야 했는데 싶기도 했다. 돈을 주웠던 친구가 부러웠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단답형 “네”를 외칠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질투가 아닐까.
남이 잘되는 꼴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못 보는 것이 질투이니 말이다. 이것을 반박할 수 없는 이유는 이런 친구한테는 더욱더 10% 만 때어주고 나머지는 내가 가질 것이라고 마음먹기 때문이다. 하나 이런 친구라는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누어 줘야 하는 친구들이 전부 그럴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더욱더 그렇게 생각한다. 친구와 마라탕을 나눠 먹을 때는 많이 낼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뭔가 얄미워 보이는 친구와 돈을 나누어야 한다면 500원이 더 나와도 250원씩 딱 적당하게, 또 정확하게 계산할 마음만 생긴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은 질투라는 불씨가 꺼질 기세를 보이지 않아 그런 것뿐이다.
우리 부모님은 이것에 가장 신선한 대답을 하셨다. “아무리 남이 더 많이 가진다고 해도 결국 아무것도 안 해도 그 돈을 가질 수 있는데 그게 그나마 이득 아닌가?” 하고 말이다. 솔직히 바닥에서 돈을 줍는 것조차 운수 좋은 날이라 칭할 정도로 어쩌면 이득 되는 하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깨지는 이유는 어쩔 수 없이 질투이다. 질투가 좋다는 것도 아니고 잘 났다고 얘기하는 것도 아니지만 내가 어찌 되든 100등 안에라도 들기 위해서는 질투가 필요하다. 나는 이 최후통첩 게임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실험해보고 싶다. 평생을 가난으로 살아왔는데 초록색이라고는 술병 밖에 보지 못하신 분들이 만원이라는 초록색 지폐를 보며 어떻게 나눌지 말이다. 어쩌면 우리보다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평생의 고난을 다 겪으신 분들이 배려라는 것을 못 할리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서울 역 노숙자들은 바닥에 까는 종이박스마저 나눠 쓰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거지도 욕심이 없을 수가 없다고 한다. 우리 인간은 전부 최후통첩 게임에 넘어갈 것이다. 어쩌면 나는 아직까지도 인간의 욕심에 대해 부정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인간의 욕심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마치 인간의 욕심과 신뢰는 우리 아빠의 주식 같다. 아빠는 소파에 앉아서 늘 주식에 관한 뉴스를 보셨다. 핸드폰이 스크롤하는 모양대로 파일 듯이 계속 화면을 올리고 내리셨다. 아빠는 이 주식은 뭔가 신뢰가 가고, 정이 가서 팔지 못한다고 말하셨다. 그 주식은 아빠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파란불을 띄고 있었지만 말이다. 신뢰도 어쩌면 중독과 비슷한 느낌을 받지 않나 싶다. 그래서 우리는 똥이 똥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된장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