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마리 토끼는 잡을 수 없는 것일까?

신자유주의 vs 공산주의

by 제이티

유지민


후기 자본주의의 정부실패 뒤, 신 자유주의 시대가 들어섰다. 신 자유주의에서는 정부실패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던 과도한 노동자 보호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의 유연성을 발달시켰다. 법적으로 비정규직을 허용했고, 기업들 간의 경쟁력이 강화되었다. 어찌 보면 초기 자본주의로 돌아간 듯하기도 하다. 실제로 신 자유주의는 초기 자본주의의 좀 약한 버전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순 없는 걸까? 초기 자본주의, 후기 자본주의를 거쳐 어렵게 만들어진 신 자유주의도 허점이 보인다. 초기 자본주의와 비슷한 논리의 신 자본주의는 문제점 또한 초기 자본주의와 비슷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노동의 유연성, 그 덕에 기쁨에 빠진 사장들이 생기는가 하면, 불안에 떠는 노동자들 또한 생기는 법이다. 이 와중에도 정정당당한 경쟁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런 불공평한 경쟁에서 밀린 기업들의 불행은 그치지 못한 채 노동자들 에게까지 이어진다. 경쟁은 많은 산재 사고를 불러일으켰고, 노동자들의 삶의 질은 점점 낮아지기만 했다. 이렇게 신자본주의도 무너지고 만다.


​아무리 연태의 바다가 아름다워 보여도, 붉게 진 노을이 아무리 좋아도, 중국 독재에 대한 적대감은 사라지지 않는 듯하다. “중국에서는 ‘왜’가 없어요. 그냥 그런 거 에요. 이유를 묻는 순간 어디로 끌려갈지 몰라요.” 항의조차 할 수 없는 조선족들을 보면서 가끔은 안쓰럽기도 하고 그런 말들을 들을수록 공산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자라나는 듯하다. 이렇듯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들은 공산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과 시선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공산주의 국가들에 인해 일어난 일인 것일 뿐, 사실상 공산주의는 ‘극단적으로 쏠린 후기 자본주의’와 별다를 바 없다.


내가 인문학 수업을 듣고 있을 때, 정탄 선생님이 수업을 진행하고 계실 때, 꾸고 회장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일은 정탄쌤이 하시지만 돈은 꾸그가 받는다. 신자유주의가 가지고 있던 문제점 중 하나 이였던 빈부격차는, ‘생산수단을 누가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꾸그의 수많은 선생님들께서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동안 ‘선생님들’이라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꾸그의 회장은 시간이라는 자원을 누리고 있다. 또, 그 시간에 다른 사업을 한다면 엄청난 이익이 생겨날 것이다. 이런 자본가들의 혜택은 빈부격차를 더욱 자극한다. 이런 경우를 피하기 위해서 생겨난 개념이 바로 공산주의이다. 공동분배가 이루어지는 세상, 가족 같은 세상을 꿈꾸며 말이다.



​나는 아직 수건을 3개밖에 개지 않았는데 남아있던 빨래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내 앞에 놓인 수건들이 언니 앞의 반듯하게 개진 수건 더미 앞에 작고 초라해 보인다. 빨래는 거의 다 언니가 갰지만, 용돈은 우리 둘 다 똑같이 받는다. 딱히 열심히 일할 의욕이 없는 것 같다. 언젠간 이 많은 빨래가 다 개질 것이고, 그게 누구의 성과인지는 용돈을 받는것과 아무 관련이 없으니까. 그냥 개는 척만 하다가 용돈을 받으면 될 것, 굳이 열심히 일하고 싶지 않아 진다.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남을 가족처럼 생각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가족에는 일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소비하는 자 또한 존재한다. 빨래 더미 앞의 나처럼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열심히 하지 않는 자가 존재한다. 일을 하든 말든 얻는 건 똑같은데, 누가 굳이 남을 위해 일하고 싶어 하겠는가?


​​‘평등’을 주장하는 공산주의. 사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평등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상대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에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무시당하는 건 정말 질색한다. 그러니 사람들이 진정히 원하는 건 피라미드 사회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이 문제에 완전 공감하고 있다. 비교는 성취감 같은 좋은 영향을 주는 반면에, 소외감 같이 부정적인 영향 또한 미친다. 아무리 평등한 사회를 외쳐봐도 우리의 일상 속에서 비교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비교를 통해 발전하겠다는 마인드셋을 갖는 것이 최선일 듯하다. 다수의 사람들이 주장하는 피라미드 사회의 비판은 경쟁을 통한 ‘스트레스’이다. 하지만 나에게 스트레스가 전혀 없다면 나는 아무 일도 끝내지 못할 것이다. 과연 이것이 그들이 원하는 결과일까?


​가장 결정적으로 생산수단이 국가의 소유가 되어버린 것이 공산주의 국가들을 독재정치의 길로 이끈 계기가 되었다. 국가는 누구인가? 모든 단체에는 리더가 존재해야만 한다. 나라 또한 그 나라를 이끌어갈 리더가 필요하다. 결국 모든 국민들의 재산은 그 한 명의 독재자가 소유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는가? 그리해 공산주의는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모습으로 변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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