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게임 왕따

by 제이티

김시훈

11월 17일

왕따라는 아이들의 파워게임 성적으로 승자 패자를 가리는 건 소수에게만 너무 유리했고 아이들은 새로운 게임으로 승패를 가리는데 그것이 바로 왕따이다. 왕따라는 게임은 학교생활 1년 동안 왕따라는 폭탄을 주고받으며 마지막에 좋은 이미지로 남아야 하는 게임이다. 모범생 가면을 쓰고 살아가기도 하고 일진 가면을 쓰며 살아가기도 한다. 왕따 게임은 1명의 희생이 남은 다른 사람들을 편하게 해 준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우선인 게임이다. 희생이 있더라도 말이다. 왕따 게임은 “너도 했잖아~”라면서 남 탓을 하게 된다. 배민을 시키고 집에서 우리가 “빨리 오세요~” 하고 기다리는 것과 같다 그런데 배달 오다가 사고가 나면 ‘나는 모르는 일이요’하면서 남 탓을 하는 것처럼 왕따도 똑같다. “쟤가 먼저 했어요” 하는 것처럼 말이다.


왕따는 장난이 아니다. 누가 봐도 상대가 안 괜찮아 보이면 폭력이고 상대가 즐긴다면 그게 장난이다. 그것조차 못 알아보는 것이 인터넷의 우리이다.


인터넷의 우리는 댓글을 하나만 써도 그 아래로 쌓이는 댓글에 휩쓸린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말만 해도 그 뒤로 나오는 말에 휩슬리면서 공범이 된다. 그러면서 자신이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 희생양을 찾는다.

“쟤는 좀 심하지 않냐?” 하면서 폭탄을 돌린다. 언젠가 자신이 그 폭탄을 가질 수도 있는데 말이다.

1년간의 왕따 게임이 끝나면 각자의 이미지가 정해진다. 모범 생가면을 쓰고 모범생이 된 사람도 있을 테고 완전히 왕따로 찍힌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1년은 이지 난이도의 게임이었다면 새 학기가 시작된 반은 하드 난이도의 게임일 것이다. 게임을 한판 해보면 모두가 공략법을 아는 것 때문이다. 왕따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희생양의 희생양의 희생양의 희생양까지 끝없이 하는 폭탄게임이다. 터지진 않지만. 폭탄을 들고 있으면 안 되는 게임. 왕따 게임 실재 폭탄처럼 터질 것 같지만 터지지 않고 남들이 폭탄에 불을 붙이려는 게임이 바로 왕따 게임이다.


평화와 질서를 지키기 위해선 어느 한 사람의 선의의 거짓말이 필요하다. 엄마가 설날에 받은 돈을 어른이 되면 준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왕따는 능력이 없어서 당하기도 한다. 힘이 약하거나 운동을 못한다거나 공부를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왕따를 안 당한다면 그것은 대부분 재능이다. 운동을 잘한다거나 공부를 잘한다거나 아니면 남들과 대화를 잘해 친구가 많다던가 그런 식이다. 하지만 재능으로 얻는 능력은 노력으로 얻은 능력보다 큰 능력이다. 손흥민이 그냥 노력만으로 그 실력을 얻은 게 아닌 것처럼 무언갈 잘하려면 재능이 필요하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노력을 하면 실력이 늘 뿐 압도적인 재능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압도적인 재능도 노력을 해야 땅에 묻힌 다이아몬드가 멋지고 예쁜 반지가 되듯 진짜 재능의 힘은 노력이 있어야 생긴다. 그래서 어릴 때 잘하는 얘들이 나중 가서 못하는 것이다. 그래도 노력이 배신하지 않는 건 맞다.

왕따는 도와주지 않았다는 비겁함 vs 직접 괴롭힌 악함 vs 관심도 없는 무관심이 있다. 무엇이 죄라고 한다면 이 모두일 것이다. 저 3가지의 공통점은 왕따에게 정신적 고통을 주었단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죄를 묻는다면 왕따에게 직접 물어야 한다.


1명의 희생이 모두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지만 반대로 말하면 모두의 행복을 위해 희생이 필요하단 것이다 행복은 언젠가 잊히지만 고통은 잊히지 않는다 트라우마라는 형태로 영원히 기억된다. 즉 1명의 고통이 99명의 쾌락보다 더 오랫동안 기억되고 나는 1명의 고통이 99명의 쾌락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웃을 때 1명은 울고 다 같이 놀 때 1명은 울고 모두가 할 수 있는 걸 하지 못하는 자유를 빼앗기는 것이 왕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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