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원
22.11.18
나는 상담 한 번 해본 적 없는 또래상담자이다. 처음 또래상담자를 신청했을 때, 생기부에 아주 가지런히 ‘친구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또래상담자였음’이라고 적힐 줄 알았던 그 기대감을 껴안고는, 아무래도 내가 상담실에서 그 신청서라는 것을 들고 집에 들어왔던 것 같다. 확실히 6학년 중반 때였던지라 시간의 여유가 있었던 건지 그 신청서를 작성했던 기억이 있다. 아주 조금 고민한 것도 고민으로 쳐준다면 우드 책상에 신청서를 두고 뚫어지게 쳐다본 그 문장에 조금 고민을 했던 것 같다. ‘한 번이라도 빠질 시에는 또래상담자 박탈’ 이 문장에 고민을 했던 이유는 고작 가스 라이팅이라는 하나의 책임 같았기도 하고, 또 그 탓에 조금 손에 근육이 뭉쳐있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11월까지 아직도 학원 시간과 아주 아슬아슬하게 붙여서 또래상담도 하나의 과제가 되었다. 아주 복잡하고 무거운 과제 말이다.
나는 상담을 해본 적은 없지만 늘 같은 또래상담자와 같이 일조의 상담 시뮬레이션을 했을 때, 혀가 굳는 느낌은 덤이고, 받침 발음은 디귿으로 나오고, 뇌도 다 짜질 대로 짜졌는지 더 이상 외를 쥐어짜고 이리저리 해도 나오지 않는 의견 덕분에 뇌의 버퍼링 시간은 계속 늘어났다. 상담자들은 그 탓에 의외로 부담감에 휩싸여 있다. 말이 나오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 느낌이다. 상담자들의 뇌를 꿰뚫어 보자면 일부로 남의 콧잔등을 보기도 하며, “음...” “어...”라는 추임새를 넣으면서 그 시간 동안 열심히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이 있다면 마치 팬 미팅에서 “아 그래요” 만 말하는 연예인과 비슷하게, 대충 이해한다는 음을 넣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가끔 이런 또래상담자를 보면 0과 1로 조작이 가능한 로봇과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어떨 때는 AI 채팅 로봇인 이루다가 더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이 말을 아주 극단적이게 표현한다면 로봇이 상담해주는 게 훨씬 낫다는 얘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로봇을 대신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존재가 ‘너의 이야기를 먹어줄게’ 책에 나오는 괴물이다. 괴물이 우리와 다른 점은 아마 죄책감이 없다는 것일 테다. 기억을 먹어주는 괴물이 아주 착하게도 허락을 받고 기억을 먹는다고 하니 왜 죄책감이 없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죄책감 없는 괴물이 기억을 지워준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대체로 트라 우마를 지워달라고 하지 않을까 싶다. 내 친구는 사이렌 소리에 트라 우마가 있어서 소방 대피 훈련 때, 사이렌 소리를 못 듣는다고 했다. 이런 트라 우마나, 생활에 지장이 가는 트라 우마는 확실히 지우고 싶기도 할 것 같다. 그렇다면 과연 기억을 지워달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 과연 내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게 전부 지워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하다. 나는 가끔 궁금했었던 것이 있었다. 자신의 존재조차 기억나지 않게 전부 지워달라고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왜 지워달라고 하는 걸까라는 궁금증 말이다. 그러고 보면 기억을 지우러 오는 사람들은 인생의 손전등이라도 찾기 위해 상담실이라는 상점을 오는 걸지도 모르겠다.
책에서 기억을 빼앗기고, 그저 순진한 웃음을 짓는 등장인물들을 보면서 마치 하나의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 같았다. 그중에는 자신의 아픔이 아닌 자신의 죄를 지우고 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말이다. 당연히 자신이 했던 짓을 후회하는 경우는 아마 인생의 절반 이상을 채우지 않을까 싶다. 후회하는 짓 중에서 죄라는 것은 빠지지 않았고, 결국 기억을 지울 때, “내가 거짓말했던 것 좀 지워줘.” 같은 말을 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흔한 거짓말을 지워달라고 한다면 지워줘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학교 폭력의 가해자라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범죄자들이 와서 기억을 지워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책에서는 기억을 지울 때 누구의 허락을 맡아야 하냐고 물었을 때, “당연히 기억의 또 다른 주인들이지.
이야기는 혼자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야. 물론 종종 예외도 있지만, 보통은 둘 이상의 사람이 만났을 때 만들어지는 게 이야기라고.” 라며 얘기했었다. 이 말은 어쩌면 자신의 죄를 회피하기 위해 기억을 지운다는 말 같았다. 범죄자들이 기억을 지워달라고 하는 이유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다거나, 아니면 사람들의 비난 속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 범죄자라는 틀 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야기는 늘 함께 만들어 간다고 하듯이, 당연히 자신이 자신의 죄를 씻는 것이 아닌, 남들이 죄를 벗겨줘야 그때 비로소 일반인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기억을 지운다는 것은 자신이 범죄라는 틀에서 벗어났다는 착각 때문에 평범한 이미지를 보여줄 수 없게 되고, 그래서 여전히 대중들과 관중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서 이기적인 범죄자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싶다. 범죄자들이 쉽게 일반인이 될 수 없는 이유조차 자기 합리화를 하다 보니 본인이 일반인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권다경은 어떤 미련도 없어 보이는 얼굴로 자리를 떴다. 저 밝은 얼굴이 그의 모습일까. 아니면, 서별을 떠올리며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던 그가 진짜 권다경일까.” 과연 기억을 지운다면 누가 가장 많이 외로워하고, 불안에 떨까. 서별의 자해 시도를 눈앞에서 보고 기억을 지운 권다경이 생각났다. 권다경을 그 누구보다 슬퍼 보였지만 상담실에 들어갔다가 나오고서는 정말 무거운 마음이 전부 버려진 듯이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서별의 얼굴도 같이 환했으면 좋았겠지만 기억이 지워지고서는 자신을 피해 다닌다고 생각하고, 결국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래도 다행이다.”라는 오직 그를 위한 말을 해주었다. 그런 말을 하면서조차 얼굴은 나아질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우울해 보였지만 말이다. 기억을 지우고 나서 두 사람의 삶의 활력이 저렇게 달라 보일 줄 누가 알았을까. 당연히 나였어도 서별처럼 미련 있는 체로 따라다녔을 것이고, 권다경처럼 그 아이를 아무렇지 않게 무시할 것이다. 하나 나는 가장 미련이 많이 생길 것 같은 짝사랑이 나를 모르고 계속 차단한다면, 속상한 마음과 함께 암울한 감정으로 뇌 색깔 또한 흑백으로 변할 것 같다. 나라면 서별처럼 몰래 따라다니는 것이 아닌 아주 집착을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서별은 겨우 흑백인 마음을 달래고 통제했기에 그 정도에서 끝낼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쩌면 기억, 트라 우마를 지우지 않고, 끝까지 껴안고 있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트라 우마란 껴안기 아주 버거운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트라 우마도 하나의 경험이 아닌가. 13년 동안 살면서 그런 역경을 겪지 못했다면 그것은 인생을 헛살아 온 것이 아닌지 의심할 법도 하니 말이다. 트라 우마가 있다면 그나마 다른 아픔은 아픔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의 면역이 생길지도 모른다. 만약 바늘에 손가락이 찔려 울고 있는데, 허리와 다리, 그리고 팔까지 수심 개의 침을 맞고 있는 운동선수들을 보면 내가 울고 있는 상처가 아무렇지 않아 보이듯이, 우리에게 상처가 하나쯤은 있어야 나중에 상처를 견딜 수도 있고, 금방 아물지도 모르겠다.
나는 옛날에 주사가 가장 무서웠었다. 어떨 때는 엄마와 같이 주사를 맞기도 했는데 내가 주사를 맞은 다음, 엄마가 주사를 맞았을 때, 내 표정과 엄마의 표정은 확연히 달랐다. 울먹거리는 내 표정과는 다르게 환하게 병원 원장님과 말씀을 나누시는 모습을 봤을 때는 ‘엄마는 신이다.’라고 생각했었다. 병원에서 나와 차를 타러 가는 도중에 내가 물었다. “엄마는 주사 안 아파?”라고 말이다. 엄마는 “애 낳고 나니까 이 정도는 안 아파. 너도 애 낳아보면 알 걸?”이라고 대답하셨다. 분명 우리 부모님도 애 낳은 기억을 지우셨다면 주사를 맞으시고는 나처럼 똑같이 엄살을 부리셨을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트라 우마는 ‘병 주고 약 주고’ 같다.
결국 트라 우마라는 건 기억에서 사라진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어제의 트라 우마가 사라졌다고 해서 내일의 트라 우마가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은 확정 지을 수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