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발전했는데 빈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by 제이티

여기 결혼 상대 세 남자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첫 번째 남자, 박보검 닮은 얼굴에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만한 대기업에 취직한 남자. 두 번째 커피프린스 공유처럼 자수성가한 카페 사장님. 세 번째 근면 성실하고 해맑은 웃음이 매력적인 농촌총각


어떤 결혼 상대가 좋으신가요? 머릿속에 답을 생각해 보면서 헨리 조지에 대해 들어 가봅시다.


부루 마블이란 게임이 있습니다. 모두들 한 번씩은 해본 보드게임으로 주사위와 말이 있고 돌면서 땅과 호텔을 사는 게임인데요. 그런데 하다 보면 느끼는 것이 게임에서 이기려면 땅이 많은 것보다 알짜배기 노른자 땅을 사는데 중요하다고 자연스럽게 느낍니다. 결국 서울에 호텔을 지은 사람이 게임에 승자가 되죠. 부루 마블의 영어판 원제가 ‘monopoly’ 이듯이 결국 토지를 독점 한자가 시장을 독식합니다. 원래 부당 지대를 고발하려고 만든 게임인데 우리는 게임의 의도보다 다른 깨달음을 얻습니다. 결국 아무리 주사위를 굴리고 황금열쇠의 행운을 얻어 봤자 결국 서울 땅을 가지지 못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비슷한 사례로 개미와 베짱이 사례가 있습니다. 원작 동화에서는 1년 내내 허리 굽혀가며 열심히 일한 개미와 노래 부르고 그야말로 욜로처럼 사는 베짱이가 있습니다. 아시는 대로 겨울이 오자 베짱이는 먹을 게 없어서 개미집에 신세를 집니다. 동화에서 알 수 있듯이 겨울이라는 미래를 대비하려면 열심히 일해야 된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하지만 현대판 동화는 다릅니다. 만약 엄마가 사준 집이 있다면 베짱이는 3년이 지나면 3억 오른 아파트가 생기지만 꼬박꼬박 월급 모은 개미는 고작 3천만 원이 생기죠. 더군다나 아파트가 3억이나 올라서 개미는 열심히 일해서 대출받아 아파트를 장만해야 합니다. 무려 3억이나 더 비싸진 아파트를 말이죠. 중요한 건 개미는 일을 했지만 베짱이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당연히 도덕적으로 봐도 이건 무언가 잘 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왜 열심히 일한 개미는 삐쩍 마른 뼈만 남은 몸매에 얼굴은 항상 걱정이 가득한데, 베짱이는 왜 그렇게 태평하게 여유 있는 미소를 갖게 되었는지 아마 현실이 너무 가혹해 일부러 동화 버전은 바꾼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런 가혹한 현실은 지금 우리가 사는 여기에도 퍼져 있습니다.


지금 현실 속 개미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갈비 만두집이 있었습니다. 작은 가게지만 사장님 항상 열정을 다해 하루 판매량을 정해놓고 항상 최상의 갈비 맛을 손님들에게 대접하는 곳이라 늦게 가면 재료가 소진돼서 못 사 먹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만큼 장사도 잘되고 맛도 좋은 곳이라 당연히 갈비 만두집은 망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장사가 잘 되는 집이 어느 날 갑자기 프랜차이즈 식당으로 바뀌었습니다. 맛이 없어서 망했다면 이해라도 되는데 지금까지 먹어본 만두 중에 top 3안에 드는 맛 집인데 왜 없어졌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바로 ‘젠트리피케이션’ 이란 현상인데요. 중산층이 살만해졌다는 뜻과 다르게 영세업자가 임대료를 감당 못해 쫓겨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장사가 잘되니 사람들이 많아지고 인구가 많아지니 자연스럽게 수요 공급 법칙에 의해 지대가 올라가는 현상인데요. 너무도 경제학적이고 명쾌한 법칙인데 우리 마음속을 불편하게 하는 진실이 있습니다. 도대체 건물주(지주)는 뭘 했다고 임대료를 받아가는 걸까요? 분명 만두집 사장님의 맛있는 갈비만두가 사람을 모았고 지역 상권을 살려놓았는데 왜 그 임대료가 오를까요?


이 불편한 물음에 헨리 조지가 답을 합니다. “창출된 부가 지주에게 수탈되기 때문이다. 모든 지대는 불로소득이고 도덕적이지 않다. 따라서 유일한 해법은 토지 단일세(single tax)다”


헨리 조지의 저서 진보와 빈곤의 한 부분입니다.
“풀, 꽃, 나무, 시내 등 모든 조건이 동일한 토지가 무한히 펼쳐진 광대한 평원을 생각해 보자. 여기에 최초의 이주민이 들어온다. 모든 곳이 살기 좋기 때문에 살 곳을 찾기 힘들다. 그 풍요로움에 당황한 이주민은 적당한 곳에 집을 지었다. 땅을 풍요롭고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만 이 사람은 가난하다. 스스로 대장장이도 해야 하고 사냥도 해야 하며 목수일도 해야 하고 구도도 수선해야 한다. 뭐든 해야 하지만 뭐든지 제대로 하는 것이 없는 상태가 된다. 이제 또 다른 사람이 이주해 온다고 가정하자. 이 사람이 정착지는 고민하지 않는다. 바로 먼저 이주한 사람이 정착한 곳 즉 이웃을 둘 수 있는 곳이다. 또 다른 이주민이 들어오며 이제 작은 마을이 형성된다.

한 사람이 소를 잡으면 다른 사람이 나누어 먹고 대장간이나 수리점이 들어서고 누군가는 연장을 수리하고 상점이 생겨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있다. 혼 자 살 때 불가능했던 여러 가지 만족감을 이제는 얻을 수 있다. 결혼식에는 축하해주는 하객이 있고 장례 때는 지켜주는 사람이 생겼다. 인구 증가가 계속되고 경제성이 높아지면서 토지의 생산성도 높아진다. 첫 이주자의 토지는 이제 인구의 중심이 되어 행정, 물류, 통신의 중심지가 된다. 인구가 많아지니 기술자, 공장 주인, 상점 주인, 전문직 종사자는 누구든지 여기 중심지에서 일을 하려고 하고 변두리에서 일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수익을 얻게 된다. 따라서 토지 소유자는 대가를 요구할 수 있다. 계속해서 도시는 확장되고 이제 마을이 커져 세인트루이스, 시카고, 샌프란시스코와 같은 대도시가 되었고 여기에는 대규모 도서관 지식의 창고 학식이 있는 교수 유명한 전문가들이 즐비한다.

이 토지의 첫 정착자 혹은 상속자는 이제 거부가 되었다. 이러한 토지 한 조각만 소유하여도 기술자 의사 교수보다 더 많은 소득이 생긴다. 어떤 땅은 금화로 포장해도 좋을 만큼의 값으로 거래된다. 그런데 이 토지는 최초의 이주자가 정착했을 때 즉 아무런 토지가치를 갖지 않았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는 동일한 토지다.


즉 진보와 빈곤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경제활동과 인간 생활의 중심을 가진 땅의 주인이 모든 진보의 열매를 독식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 때문에 열심히 일해도 영원히 빈곤의 덫에 붙잡히게 된다는 점이죠. 아무리 노력해도 그 노력한 만큼의 열매가 땅의 주인에게 돌아가는 구조이기 때문이죠. 지주가 악해서 그런 게 아니라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이 누군가가 토지를 ‘사유하고 독점’ 할 수 있다는 게 문제라고 본겁니다. 따라서 해결책도 간단합니다. 토지를 몰수하고 골고루 나누어 주자는 게 아닙니다. 바로 토지 독점으로 발생한 부를 세금으로 징수 하자는 것이죠.


토지 사유는 범죄이며 도둑질이라는 그의 주장은 어떠한 선입견 없이 바라보았을 때 심장을 울리는 영혼의 외침이라 생각이 듭니다. ”아무런 토지가치를 갖지 않았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는 동일한 토지다 “ 이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토지는 혼자 스스로 잉여가치를 생산해 내지 못합니다. 농부의 이마의 땀방울만이 오직 황금 들판을 만들 수 있으며, 생산라인의 어린 여공의 손가락만이 직물과 옷감을 짤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지대는 깊은 지하에서 목숨 걸고 일하는 사람에게도, 배를 타고 거친 파도와 싸우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도 부과됩니다. 추위 떠는 사람에게 온기를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아픈 자 에게 약을 빼앗는 게 바로 ”지대”라는 불로소득입니다.


헨리 조지의 문명의 근본적인 병폐와 근본적인 해결책을 추구했습니다. 모든 불평등과 빈곤의 원인을 ”토지 사유“ 라 여겼던 그의 주장은 완벽한 진리가 아닐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주의자, 이단아, 말도 안 되는 혁명가로 그를 몰아세우며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수억씩 오르는 아파트 값과 매달 없어지는 작은 가게를 볼 때마다 저는 감히 진리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헨리 조지가 밝히려고 했던 진리는 이미 분명하게 밝혀졌습니다. 다만 그 진리가 여기 온전하게 받아들여지기 못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세상 곳곳에 있지만 진리가 받아들여지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보통사람들은 ‘진리’ 보단 ‘이익’을 중시하기 때문이죠. 우리 역사 속에서도 노태우 대통령의 ‘토지 공개념’ 노무현 대통령 ‘종합부동산세’도 사실상 위헌 판정이 났습니다. 모두들 서민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집값을 안정화시키려 했던 정책이었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 광해군이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난 이유도 사실 오랑캐를 섬기고, 부모에게 불효하고 동생을 죽여서가 아니라 ”대동법“이라는 부동산세를 부과했기 때문이죠. 당시 대동법은 땅을 가진 지주에게만 특산품을 쌀로 대신 걷자는 세금 제도인데, 당연히 기득권층의 반발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 문재인 정부에서 시행하는 ”토지공개념“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 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주와 기득권을 욕하면서도 모순된 진실은 나도 그들처럼 제대로 부자가 될 수 있다면 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나도 목 좋은데 투자해서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정부가 빼앗는다고 주장하면서 말이죠. 집값이 너무 올랐다고 걱정하며 뉴스를 보며 혀를 차지만 막상 집값 떨어지는 장애인 복지관 시설이 우리 동네에 들어온다고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몰라도 피켓을 들고 나라 잃은 백성처럼 함께 외칩니다. 어쩌면 불로소득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함께 사는 세상을 만 드려는 헨리 조지의 ”진리“는 부딪힐 수 밖에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외침인 헨리 조지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토지 단일세라는 진리가 너무도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뼈를 깎는 수술이라는 사실을 헨리 조지 자신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의 주장이 섣부르고 현실성이 없다고 깍 아 내릴게 아니라 실패하면서 좌절하면서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깝게 다가서려는 그의 몸부림에 아름답다고 박수를 쳐줘야 될 것입니다. 언제부턴가 아이들이 꿈이 내 집 마련과 더불어 월세 받는 건물주라 합니다. 여기서 제가 안타까운 건 기존 질서에 대해 불만도 많고 비판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을 부러워하고 동경하는 건 아닌지 하는 점입니다. 모두들 근본적인 변화와 구조를 변화시키는데 불가능하다고 합리화하면서 변화를 위한 노력보다는 또 다른 ‘그들’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어려운 일을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라고 묻는다면, 우린 절대 맛있는 갈비만두를 입에 넣을 수 없을 것이며 늘 비슷한 프랜차이즈 식당만 가야 할 것이고 독특하고 예쁜 감성 넘치는 거리를 못 갈 것이고 언제나 데이트는 복합쇼핑몰에서만 해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앞으로 아이들에게는 지식과 학문이 아닌 시세차익과 목 좋은 곳을 보는 안목을 가르치는 실학자 선생님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결혼하려는 세 남자가 있습니다. 누구랑 결혼해야 할까요?

1. 대기업 직장인

2. 카페 사장

3. 농촌 총각 (땅 있음 , 신도시 개발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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