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구두와 사과
백지원
일당백 집사라는 드라마에서는 단돈 백 원으로 사람들이 귀한 시간을 들여해야 하는 잡다한 일을 해주는 등장인물이 나온다. 당연히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굳이 돈을 주면서까지 시간을 아낄 필요는 없다고 얘기했지만, 그런 반응에 비해서 많은 사람이 돈을 주고 일을 줄이게 되고, 그 덕분에 사람들은 시간을 아낄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나는 그 짧은 일 분, 일 초 정도는 버려도 괜찮은 시간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학원에서는 외우는 영어단어를 몇 분이라도 더 외우면 오히려 기억에 조금이라도 더 남는 것처럼, 과연 그 시간을 간결하고, 간단하게 보내도 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생각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연도는 좀처럼 대충 산 느낌이 들지 않는다. 우리 반 칠판에 써져 있는 D-15는 주말을 뺀 나머지, 그러니까 학교에 오는 횟수를 적어두신 글자인데, 이걸 보면서 ‘벌써 중학생’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마침 오늘 눈이 와서 눈이 소복하게 가득 온 눈을 보면서, 함께 우리 학년 애들도 같이 눈에 담아봤는데, 이럴 때는 꼭 아직도 3학년에 머물러 있는 것 같고, 아직 중학교에 올라갈 준비가 안 된 것 같기도 하다. 눈이 안 오면 어떡하지 하면서 걱정하던 날이 벌써 1년 전의 걱정인데, 지금은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어떡하지 하는 걱정을 하고 있다. 시간이 참 야속하다는 말이 떠오른다. 옛날에는 야속을 약속을 잘 못 쳐서 오타 난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뜻까지 생각해 내다니. 분명 뇌와 몸은 중학교 맞춤형이 되었는데도, 안에 있는 본심이라는 본체는 아직도 초등학생처럼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 한다. 그만큼 시간을 대충 썼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걱정하는 것이 졸업사진 밖에 없다면 또, 대충 썼다고 할 수도 없을 만큼 알차게 보낸 것도 같다.
시간을 파는 상점이 있다면 나는 글쓰기부터 해달라고 빌 것이다. 그럼 당연히 사람들은 괜히 하기 싫은 일을 떠맡기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또 하루 종일 농땡이나 피우려고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가장 시간을 많이 빼앗아가는 것이 글쓰기라고 생각하기에 대신 부탁하는 것인데 그 이유가 있다면 그건 추억 때문일 것이다. 뭐 글쓰기를 워낙 잘하는 애들이라면 한 장을 20~30분 안에 쓸 테고, 나도 뭐 어떨 때는 비슷비슷하게 쓸 것이다. 하지만 정확한 단점은 그 무엇도 아닌 쓰는 시간보다 생각하는 시간이 자꾸 조금씩 방해를 하기도, 또 시간을 잡아먹기도 하기 때문에 걱정이라는 것이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눈 뭉치를 뭉칠 때도 ‘아 글쓰기 오늘까지 써야 되는데.’, 급식을 먹을 때도 ‘아 글쓰기 오늘까지’, 체육시간에 피구 할 때도 ‘아 글쓰기’라고 자꾸 떠오르니 체육시간에 자꾸 멈췄다 움직였다 하다가 하필 제일 피구를 잘하는 애가 내 뒤통수를 공으로 뻥 맞춰버리니 체육 쌤이 말하신 데로 주사 맞는 느낌이 물씬 났다. “글쓰기가 밥 먹여 주냐?” 친구들이 하는 말이 항상 비슷했다. 정말 글쓰기가 밥 먹여주는 것처럼 늘 입에는 ‘글쓰기 안 했는데.’라는 말만 바르고 다닌다. 사실 지금도 친구를 불러서 사진으로만 보던 눈사람을 만들고 싶지만 껌껌한 밤에 불이나 키고 연필과 종이를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현실 때문에 엄청난 눈사람을 만들기는 아마 못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이 생긴다. 하지만 글쓰기가 늘 추억을 없애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위험한 일을 줄여주는 것도 맞는 말이지 않을까 싶고, 따뜻한 곳에서 아늑하게 있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더 시간을 헛되이 쓴 느낌도 들지 않는다. 조금 지루하지만, 지루함을 느끼는 것이 곧 시간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시간을 느낀다는 말은 되게 선선한 바람이 부는 느낌이 든다. 옛날에는 학원이 끝나고, 노래를 들으면서 주황빛이 도는 노을을 보면서 바람을 느꼈던 것이 되게 많았다. 위로받는 느낌도 들고, 또 한 숨을 쉬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 같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바람을 맞으면 시간이 가는 느낌을 받는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 안에 뇌 안에 있던 잡생각이 털어질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그때는 많은 걸 할 수 있었던 몇 분 동안 쓸모없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시간 동안 내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시간을 느끼면 느낄수록 내가 변해 간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몇 날 며칠이 지나면서 내 노래 취향은 정말 다르게 바뀐 건 물론이고, 조금씩 성숙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이 점차 느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번 연도의 내가 완전히 똑같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되게 자잘한 것들이 바뀌어가고 있는 것 같다. 이번 초에는 말 안 해도 비디오라고 할 만큼이나 피구를 더럽게 못했다. 피하는 것만 못하는 것이 아닌, 잡는 것, 던지는 것 마저 못하는 운동 저질이었던 것이나 마찬가지 인 듯하다.
하지만 졸업을 얼마 안 둔 지금만 해도 피구 왕 통키라고 불릴 만큼 애들에게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줬던 적이 있다. 또한 지금 내 방 옷걸이에 걸린 옷들은 전부 성숙한 옷들이, 또 평범한 옷들이지만, 이 자리가 만들어지기까지는 꽤 많은 작업이 거쳐 가면서 생긴 성숙함이었다. 옛날에 입었던 옷의 70%는 전부 갖다 버리고, 나머지 옷은 거의 안 입거나, 조금 입는 정도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엄마는 그 옷을 정리하시면서 얘기하셨다. “옛날에는 이거 네가 잘 입었었는데”라고 말이다. 옛날에는 당연히 많이 입었다. 딱 전부 기준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옛날과 지금은 벌써 1년이나 지나 있는데 어떻게 사람이 늘 한결같을까. 지금 글을 쓰면서 생각하는 나조차도 계속해서 바뀌고 있을 것이다. 뇌 세포 중 한 두 개 라도 말이다.
내가 바뀌는 모습은 내가 찍은 인생네컷에 전부 나타나져 있다. 내가 찍은 사진만 해도 23장이니 아마 내 변화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 모든 게 바뀌어 있는 것도 아니다. 학교에서 늘 보는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말이 왜 있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습관이 왜 무서운 지도 알 것 같으니 말이다. 내 버릇은 옷 밑에 박음질된 부분을 만지는 습관이 있다. 엄마는 그 모습을 보시고는 “그러다가 진짜 지문 사라지면 민증 못 만든다.”라는 경고를 하셨다. 사실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제일 바뀌었으면 했던 점이 바로 이 버릇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나이만 더 빨리 먹고, 뭔가 이별이 더 빨리 찾아오는 느낌이었다. 분명히 1학년 때는 2학년이 되고 싶었고, 3학년 때는 4학년이 되고 싶었고, 5학년 때는 중학생이 되고 싶었는데, 6학년, 곧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는 나이에 ‘1학년으로 돌아가고 싶다.’라는 그리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 막상 ‘이게 진짜 내가 원하던 것일까.’라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에게 시간은 이런 것 아닐까. 우리에게 바꿀 수 있는 기회를 공짜로 주는 것이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것 말이다.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처럼, 그리고 백설 공주의 사과처럼. 하지만 막상 그 기회가 찾아왔을 때는 오히려 그리움을, 그리고 ‘이게 내가 원하던 걸까’ 하며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는 잔혹한 성장통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