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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May 21. 2020

부모를 선택할 수 있다면? -책 페인트 서평-

한참 사춘기가 시작될 어느 날 엄마에게 대든 적이 있다.


'해준 것도 없으면서 왜 나를 힘들게 낳았냐고' 그러자 돌아오는 말


'나도 니 같은 아들이 나올 줄 몰랐다.' 역시 우리 엄마는 쎄다.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에 누구나 한 번쯤은 (?) 그렇듯이 친구 집과 비교하며 엄마 마음에 대못을 박은 기억이 있다. 돌이켜 보면 철이 없고 부끄러운 '나'였지만 그때는 왜 그렇게 부모에 대한 원망이 컸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god의 노래처럼 '남들 다하는 외식 한 번 한 적이 없었고~'도 아닌데 심지어 짜장면과 탕수육도 곧 잘 시켜 먹었는데 이른바 청소년이 겪는 질병 "나만 없어 병"에 걸려 있었다.


그 당시 나의 워너비 아이템은 나이키 신발. 흰색 바탕에 검은색의 그 부드럽고 날렵하게 꺾인 모양이 어찌나 멋져 보이던지, 엄마에게 사달라고 졸랐지만 나의 신발은 언제나 르까프로 돌아왔다. 나이키는 나중에 네가 직접 돈 벌어서 사서 신으란다. 아니 세상에 어떻게 이런 엄마가 있을 수가 있는지 하늘이 무너지고, 억울해서 일부로 새 신발을 꾸겨 신고 다녔다. 나이키는 저기 저 티브이에 나오는 박찬호 같은 선수만 신는 신발이란다. 아직 나는 그런 것을 신을 자격이 없단다. 무슨 나이키가 신데렐라 구두도 아니고, 메이저리거만 신을 수 있는 신발이라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 생각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돈을 가진 자의 말이 진리인 법이라 더 이상 대들 수도 없었다.


나이키 신발을 사주는 그런 집에서 태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이키를 신고 있는 박찬호도 아닌 친구 녀석은 그것의 소중함을 모른다. 인간사의 비극 중 하나는 누군가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가진 사람은 그 '간절한'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시절 나에게 있어 좋은 부모는 나이키를 사주는 부모였다.


책 '페인트'는 좋은 부모는 어떤 부모인지 대한 물음을 담고 있는 책이다. 페인트의 뜻은 (parent's interview)의 약자로 이른바 부모 면접이라고 부를 수 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자식이 부모를 면접을 보고 선택을 한다는 비현실적인 설정이 흥미를 끌었다. 저출산으로 인해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가까운 미래 대한민국에서는 어쩔 수없이 NC센터를 설립한다.


NC센터 즉 (Nation's children)

 국가의 아이들 아이 낳으면 혜택을 주는 것을 넘어 직접 국가가 아이를 키워주는 시설.

성인이 되기 전까지 국가에서 마치 기숙학교처럼 철저한 교육과 사회화 과정을 거쳐 아이에게 꼭 맞는 부모와 연결시켜 주는 일종의 아웃소싱 업체.

공동체 집단생활과 엄격한 규율, 건강 관리 및 학습 관리 및 균형 잡힌 식단까지 마치 부잣집 도련님들이 다니는 사관학교 같은 집단.


어쩌면 지금도 돌봄 교실에다가 유치원 초중등 과정까지 국가의 예산으로 의무 교육을 시행하고 있는데 이제는 직접 아이를 기르고 키운다는 게 오히려 더 괜찮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처럼 부모의 뽑기 운에 따라 잘 사는 부모와 그렇지 않은 부모의 격차에 따라 아이들의 학벌 직업 사는 곳까지 결정되는 세상에서 어쩌면 괜찮은 유토피아 대안 일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 대사처럼 15점짜리 부모 밑에 태어난다면 이미 그 아이는 나이키 신발은커녕 매일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만날 수도 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고서야 십중팔구 신문 기사 사회면을 장식하는 그런 아이가 된다.



세상에 어떤 부모도 부모가 될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아이를 맞이하지 않는다. 시간적 경제적 또 온전히 아이에게 사랑을 건네줄 마음의 여유를 가진 상위 클래스 90점짜리 부모가 몇 명이나 될까? 그런 이상적인 부모는 청소년 드라마나 공익광고에서나 볼 수 있다. 소설 속 아이들이 6월이나 7월에 많이 태어나듯이 불같은 사랑의 실수로 태어난 아이들도 수두룩 하다.


탄생이 원인이 사랑이 아닌 실수인 아이.


누구나 아이를 사랑하지만 아무나 사랑할 수는 없다. 그 사랑에는 적어도 가족을 굶기지 않기 위해 적지 않은 자기 시간과 자유를 포기해야 되기 때문이다. 아이를 사랑하지만 키우기는 싫은 사람들. 마치 귀여워서 강아지를 분양했지만, 돈 많이 들고 털 날리고 징징대니까 버리는 사람들처럼.



어쩌면 15점짜리 부모 보단 100점은 아니더라도 80점짜리 NC센터가 훨씬 낫지 않을까. 적어도 아이를 때리지도 굶기지도 바보로도 만들지도 않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NC 출신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 농수산물도 원산지를 보고 사 먹듯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출신을 따진다. 아무리 맛있어도 어디서 만들었는지 모르면 불량 식품이다. 웬만한 부모보다 훨씬 더 잘 보살펴주는데 부모가 없는 아이 NC 출신이라서 차별을 받는다. 따라서 사회에 완벽하게 스며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모를 찾아야 한다.



아이는 낳고 싶지만 키우기는 싫은 부모가 있는 반면, 낳기 싫지만 키우기는 원하는 부모가 있는가 모양이다. 비록, 정부 보조금을 받기 위해서 인지, 진정 아이를 사랑해서 입양을 원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그 선택을 바로 아이들이 한다는 점이다. 내가 직접 고르는 부모라니 마치 소개팅이나 맞선처럼 결혼을 하기 위해 배우자를 고르는 것처럼  사뭇 설레고 긴장되는 과정이다. 겉모습만 보고 혹은 몇 마디의 달콤하고 따뜻한 말에 넘어 거 결혼을 한다면 그 만남을 이어줬던 주선자를 평생 증오하게 된다. 그래서 NC센터는 일정 기간 면접과 테스트 최종 합숙을 통해 나와 잘 맞는 부모가 어떤 부모인지 충분히 알아가는 기회를 제공한다. 아이를 사랑하는지 아니면 든든한 노후 보조금으로 생각하는지 말이다. 몇몇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의 부모 소개팅 '페인트'를 통해 자연스럽게 새로운 가족의 품으로 간다.


결국 페인트는 완벽한 부모를 찾기 위한 과정이다. 그런데 과연 완벽한 부모를 찾을 수 있을까? 물론 지금도 나랑 꼭 맞는 짝을 찾아주는 결혼정보회사 및 어플이 유행을 하고 있지만 그렇게 해서 만난 짝도 헤어지기 일수다. 아직까지 아니 어쩌면 앞으로도 빅데이터가 하지 못하는 겪어봐야 아는 그런 묘한 게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공기와 그때의 공기가 다르듯이 시시각각 계절 따라 변하는 사람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다. 예쁘다고 해서 골랐던 옷이 나중에 보면 그렇게 촌스러운 것처럼 인간의 선택이라는 것은 언제나 합리적이지도 그렇다고 정확하지도 않다. 옷장을 열어 안 입는 옷만 세워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발품을 팔고 입어보고 벗고 해도 실패하기 마련이다. 인터넷으로 샀다면 훨씬 더하다. 그런데 사람을 어떻게 겪어 보지도 않고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한 순간의 풋사랑을 만나는 게 아니라 평생을 함께 할 부모를 말이다.


 또한 완벽한 부모는 완벽한 아이를 바라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나는 몇 점짜리 아들일까? 엄마의 기준에서는 다른 엄마의 자식들과 비교할 수밖에 없는데, 나는 그토록 무섭다던 엄마 친구 아들과 과연 경쟁이나 될까?

학교에서 공부는 몇 등을 해야 하고, 연봉은 얼마를 벌어야 하며, 용돈을 얼마를 드려야 하며, 전화는 몇 번을 드려야 이른바 '엄친아'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자식이 바라는 부모와 부모가 바라는 자식 그 영원한 괴리는 당연히 비극의 씨앗이 될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 때 아버지랑 아들이 겸상하는 경우는 드물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밥 먹다가 서로 죽고 죽이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 또한 마찬가지다. 먹고 먹히는 정글 속에 살아 남아 라이언 킹을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어쩌면 당연한 심정 일 것이다. 사자 새끼 중에 성인으로 자라는 사자는 10프로도 되지 않는다. 10마리 중 9마리는 부모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라이언 킹이 새로운 수사자의 도전을 이겨 내지 못하면 그의 자식들은 모두 죽기 때문이다.


지금의 사회가 정글처럼 경쟁이 치열해서 부모는 사자 새끼처럼 키울 수밖에 없는 것인가? 자식을 있는 그대로 평생 품 안에 따뜻하게 키우고 싶지만 세상은 차갑고 춥기만 하는 것일까? 그래서 자신 없는 부모들은 일찌감치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것인가? 라이언 킹처럼 끝없이 도전자를 상대로 매 번 이기기는 힘드니까.


처음에는 좋은 부모란 어떤 부모인가? 혹은 부모와 자식관계는 어떤 게 바람직할까 생각했는데,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점수를 매기고 완벽함을 바라는 것 자체가 서로가 서로를 비교를 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NC 센터에서도 매칭률이 주요 실적이 돼서 예산을 탄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차별은 나쁜 것이라고 주장을 한다. 점수가 있는데, 어떻게 차별이 없을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꼭 정글에서 사자가 될 필요는 없다. 사슴도 있고, 여우도 있고, 메뚜기도 있고, 개미도 있고, 이름 모를 벌레도 많다. 사자처럼 왕의 자식은 도전자들을 상대해야 되니까 강하게 키워야 하겠지만 내가 왕족으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역모로 몰려서 죽을 운명도 아니다. 그 무거운 왕관을 버티지 않아도 된다. 우리 부모가 왕이 아니듯이 내가 왕자처럼 수업을 받을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하면, 그렇게 완벽할 필요가 없다.




지금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사자인가?

 영화 300의 레오디나스 왕처럼 맨몸으로 늑대를 잡아야만 왕이 될 수 있는 그런 백두 혈통으로 태어났는가?



사실 나는 그렇게 대단한 놈이 아니었다.


맞다. 우리 엄마 말이


나는 그 나이키를 신을 자격이 없었다.  박찬호도 아닌 것이..


그래도 맨발로 다니지는 않았다.


만약 내가 NC 센터처럼 부모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나이키 신발을 사주는 부모를 택하겠지만, 그 부모는 우리 엄마처럼 찰진 욕도 못할 것이고, 젓갈 양념 가득한 김치도 못 담글 것이다.


이거 고기에 싸 먹으면 진짜 맛있다.


주어진 운명에 감사하라는 신의 말씀은 기분은 나쁘지만 틀린 말은 아닌듯 하다.








https://youtu.be/K26ezMz7k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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