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아미
계주를 뽑을 때는, 한 명씩 실력을 검토하고, 대충 항상 우승하는 애들에게는 공통적으로 들려오는 말이 있다. 옆이나 뒤를 보면 안 된다고. 보지 않음에도 결코 우승하지 못하는 아이들 또한 존재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지만, 조금의 가능성을 따지기 위해 고개는 한 번 정한 곳에서 떼려하지 않는다. 눈 앞에는 하얀색 결승선이 있고, 그 많은 땀방울과 이미 풀려 널브러진 신발끈은 앞으로 움직이나 과정의 극히 일부였을테니 말이다.
지각이라는 난관에 부딪히려 할 때에는 그로부터 벗어남을 목표로 눈 앞에 보이는 푸른 새싹 돋은 나무들을 제치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밟아가곤 한다. 희미했던 목적지가 아닌 머릿속으로도, 저절로 움직이는 나의 몸 또한 뚜렷하게 가리키는 장소를 가야한다는 것은 결코 선택지 중 하나가 아니였다. 나의 손에 쥐어준 그이에게는 선택지라 보였을지라도, 나는 그이가 아니였으니 말이다. 나를 독촉과 재촉으로 앞으로 밀리도록 만든 것은 나 자신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의 시작지는 내가 아닌 그이였을 테다.
앞으로 뛰어가며 그 평평한 땅을 밟다가도 다시 뒷걸음질 치는 순간들은 의도치 않게 발생했다. 대부분의 경우는 엄지손가락이 하나 올라간 주먹이 아닌 그 상태가 거꾸로 유지되는 손동작을 받을 만한 상황이었기에 나는 이를 '실패'라 부르기로 했다. 정해진 목적지가 아닌 곳을 의도했더라도, 하지 않았더라도 극복해낼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매번 같은 길을 건너도 항상 뛰어가는 것이 일상이였다. 버스가 나의 눈 앞으로 골려준다는 듯이 지나갈까, 삑 소리가 두 번 울리는 카드를 찍고는 출구 앞에 서있지 못하지는 않을까 언제나 초록불이 되기만을 기다리며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 뛰어가곤 했다. 앞에는 충분해 보이는 도착지가 정해져 있었기에 숨이 찬다 싶어도 결코 옆에 있던 벤치에서 숨을 돌릴 시간은 없었다.
차에서는 눈을 붙이면 바로 자던 것이 일상이였고, 눈을 뜬다 싶어도 이미 종착지에 도착해 있었다. 창문이 필요가 없다 싶을 정도로 활용하지 않았고, 본다 싶어도 그때는 엄마의 말 때문이었다.
강압적이였지만, 창문을 통한 거리는 결코 내 앞을 가리던 키 큰 나무들과 생판 다른 모양이었다. 나의 종착지에는 볼 수 없었던 여유로움과 그늘이 다 막아준다 싶을 정도였고, 그때만큼은 한 번 앉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의 발자국을 느껴왔던 땅들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내가 자랑스러웠을까. 내가 바보 같은 존재였을까. 세상은 넓지만 보지 못하던 나였고, 마음을 먹으면 할 수 있는 행동이였다. 막상 보고 나면 쉬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아우라였고, 그를 나에게 어필시키고는 했지만, 우연히 옆을 본다는 것조차 숨 돌릴 시간은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