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민
나는 차가움이 두렵다. 지금까지 받아먹고 자란 건 따듯한 응원과 격려이기에, 부모님께서 다져 주신 길을 걷다 발을 헛디뎠을 때 넘어지기 전에 내 팔을 붙잡아준 것도 이의 강력함 이였기에, 언젠가부터 땅과의 접촉을 두려워하게 된 지도 모르겠다.
한국에 와서는 쓰시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던 엄마의 중국 핸드폰. 우연히 엄마께서 화면을 켜시는 걸 보게 되었다. 잠금 해제 후 첫 화면은 '나에게 보내기' 메세지 창 이였다. 화면은 글자들로 꽉 채워져 있었는데 자세히 읽어보지 않아도 무슨 내용인지 대강 짐작이 가능했다. 예상치 못한 사고로 계획보다 일찍, 급히 한국으로 들어와야 했고, 사다리 모양으로 분리된 나의 팔뼈에 철판을 박는 수술이 뒤따랐다. 엄마께서 자신에게 보낸 장문은 이 수술이 뒤따랐다. 엄마께서 자신에게 보낸 장문은 이 수술 전 후로 계속 써 내려온 엄마의 기도와 걱정을 담은 일기였으니. 어느 날 엄마께서 감사일기를 함께 써보자고 하신 것이 기억난다. 나는 이 뜬금없는 요청을 거절했지만 엄마께서는 혼자서도 이를 해내고 계셨구나.
부모님의 헌신과는 별개로 내 앞을 막는 걸림돌이 있었다. 이것은 나의 노력과 능력치였는데 이를 옆으로 비켜 세우기 위해서 내게 내려진 영양제는 학원과 과외 등 이였는데 어떨 땐 영양제가 터무니없게 비싸기도 했다. 수술 뒤 한국에 있는 동안을 위해서 수학 과외 선생님이 한 분 오셨었다. 이 수업 그 비싼 영양제 중 하나 이였는데 과외를 하게 된 이유가 사고의 원인 이였던 아이와 같은 학원에 나를 보내지 않으려 하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수업이 별로라고 말했다. 진짜 선생님이 마음에 들지 않은 점도 않은 점도 있었지만 그 말이 지금의 나로서 엄마 아빠께 드릴 수 있는 최선 이였으니까.
여느 학원도 가지 않고도 탁월한 성적을 기록하는 아이가 하필이면 내가 가장 친하게 지내는 친구다. 나 또한 체육을 제외하곤 A등급 내로 성적을 반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과목들에서 A+를 받는 친구에 비해선 부족했다. 머릿 속으로는 학원이라는 서포트를 받지 않고도 더 나은 성적을 받는 친구가 더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언제나 시간이 더 많은 그 아이가 더 과제에 힘을 쏟을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대신 대체하려 애쓰게 된다.
3년 특내라는 혜택이 있는 우리 언니와는 다르게 나는 애매한 기간에 껴 있는 탓에 이런 혜택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같은 삼 년 반이지만 나는 누구 와도 같게 수능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 억울하지도 했지만 정정당당하게 나와 언니 둘 다 같은 시험을 보았더라도 내가 언니를 이기지 못했을 거라는 명백한 사실이 나의 양심을 아프게 찔렀다. 어쩌면 나의 억울함은 불안함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