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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Jun 25. 2020

형제는 싸우기 위해 태어나는가?

역사의 가혹한 장난 -왕자의 난-

아이들은 언제나 싸운다 그것도 별거 아닌 걸로 말이다. 심지어 형제는 태어나서 가장 처음 만나는 적이라 하지 않는가? 어른들은 말한다. 사이좋게 우애 좋게 지내라고 하지만 그렇게 말한 어른들 조차 유산 상속을 둘러싼 형제간의 갈등은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형제간의 다툼은 여러분의 가정뿐 아니라 역사 속에 언제나 존재해 왔다.


 왕자의 난은 대게 새 왕조의 건국자가 죽은 직후에 벌어진다. 그 이유는 알기 쉽다. 건국자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종신토록 절대 권력을 유지하지만, 문제는 그가 죽고 난 이후에 벌어진다. 일단 맏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대개 맏아들쯤 되면 자기 아버지가 새나라를 세우기 이전에 장성한 아들로서,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늘 보조 역할에 머물렀다. 건국자만큼의 카리스마를 가질 수 없고 그만큼 업적을 쌓지도 못했다. 더구나 개국공신들 중에는 자신이 왕자가 되기 전에 아저씨나 삼촌처럼 섬겼던 아버지의 부하들이 수두룩하다. 이런 상태에서 맏아들의 카리스마는 생겨나기도 어렵고 설령 있다 해도 정치적 의도로 무시되기 십상이다.      


우리 역사에서 왕자의 난은 고려초와 조선초에 있었다. 고려를 세운 왕건은 건국 과정에서 지방 호족들과 정치적 통혼을 많이 한 탓에 스무 명이 넘는 왕자들을 남겼다. 아버지는 똑같지만 어머니는 각기 다른 지방 호족의 딸들이므로 왕자들의 힘은 곧 외가들의 힘이었다. 왕건이 죽자 일단 서열에 따라 맏아들 왕무가 왕위에 오르지만 고려가 건국되기 전에 왕건과 결혼했던 그의 어머니 집안은 세력이 강성하지 못했다. 늘 권력 불안에 시달렸던 혜종이 재위 3년을 채우지 못하고 서른세 살로 병사하자 그의 어린 아들은 당연히 권력 계승에서 배제된다. 그 대신 왕건의 다른 아들들, 그중에서도 당대의 유력 가문이었던 광주 세력과 충주 세력 간에 권력 쟁탈전이 벌어졌고 여기서 충주 세력이 승리를 거둔다. 이후 이 가문의 형제지간인 정종과 광종이 왕위를 계승하면서 고려의 왕통이 안정을 찾아간다.


 그런가 하면 조선 초 왕자의 난은 아예 초장부터 피비린내 나는 살육극으로 진행된다. 태조 이성계는 장성한 여섯 아들의 권력다툼을 피하기 위해 그 아들들을 배제하고 둘째 아내에게서 얻은 어린 두 아들 중 맏이를 세자로 책봉하는 무리수를 둔다. 여기에는 아마 조선 건국의 총감독이자 자신의 브레인이었던 정도전의 권고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정도전은 사대부가 실권을 쥐는 유교 왕국을 꿈꾸었으니까, 그러나 야심가였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그 참에 정도전을 제거하고 이복동생들은 세자 형제마저 살해한다. 두 아들이 한 아들의 손에 죽자 환멸을 느낀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나자 방원은 일단 형제들 중 서열이 맨 위였던 방과에게 왕위를 계승시킨 뒤 그 뒤를 이어받아 결국 왕위를 차지하고야 만다.     


 이렇게 형제들 간에 왕위 계승을 놓고 골육상잔의 비극이 벌어지는 것은 중국의 왕조도 마찬가지다. 진시황이 죽자 승상이 태자를 죽이고 다른 왕자를 즉위하게 한 사건,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이 죽자 여태후가 집권해 11년 동안 두 왕을 갈아치우고 자기 동생을 즉위하게 한 사건이 예고편이라면, 당나라 초기 왕자의 난은 본편이다. 당의 건국자 이연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 동안 둘째 아들 이세민이 형과 아우를 죽이고 제위를 오르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으니 그 점에서 700년 뒤에 등장하는 조선 이성계의 한참 선배다.   

   

14세기 명나라 초기에도 역사의 시계추는 어김없이 되풀이된다. 명의 건국자 주원장은 무엇보다 개국 초기에 왕권의 안정이 절실했다. 그래서 철저하게 장자 계승을 관철시키기 위해 맏아들을 태자로 삼고 나머지 아들들을 모두 변방으로 내쫓았다. 하지만 태자가 자신보다 먼저 죽는 것은 안타깝게도 그의 계산에 없었다. 주원장이 죽자 일단 손자가 건문제로 제위를 계승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멀리 베이징으로 밀려나 있던 삼촌 주체가 반란을 일으켜 조카의 제위를 찬탈한다. 그가 바로 영락제인데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차지한 조선의 세조의 50년 선배에 해당한다.          



 “왜 동양에서 왕자의 난이 많을까?   
 

 이렇듯 정치와 경제에서 혈통을 매우 중시하는 경향은 서양 사회보다 동양사회가 훨씬 강하다. 그 배경에는 역사적 차이가 있다. 사실 국가든 기업이든 지배자라면 동서양을 불문하고 누구나 혈통적인 지위 세습을 절실하게 원할 것이다. 험한 세상에 피붙이만큼 믿을 수 있는 후계자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서양의 역사에서 혈통이 큰 역할을 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었다. 왕이라 해도 일부일처제가 엄격히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아내가 한 명뿐이므로 아들을 낳지 못하면 혈통 계승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팍스 로마나를 이끈 로마제국의 5 현제가 양자 상속 제로 왕위를 계승시킨 것이 대표적인 사례지만 중세에서도 서양에서는 교회법에 따라 일부일처제를 철저히 지켜야 했다.     



그에 비해 동양의 왕조시대에는 합법적으로 축첩이 가능했으므로 가문의 혈통이 끊기는 경우가 없었다. 그렇다면 동양의 왕조는 서양의 왕조에 비해 권력 계승이 안정적이었을까? 언뜻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여기에는 큰 부작용이 있다. 계승권자가 많아진다는 점이다. 이것은 혈통이 끊기는 것 못지않게, 아니 때로는 그보다 더 심하게 권력 안정을 위협하는 요소가 된다. 서양의 역사에서 보기 드는 왕자의 난이 동양의 역사에서 잦았던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왕자의 난 아이러니”     



그런데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렇게 왕자의 난에서 승리해 야망을 달성한 권력자들은 하나같이 집권 후에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고려의 충주 원군(광종) 조선의 이방원(태종) 당나라의 이세민(태종) 명나라(영락제) 모두 아버지가 세운 신생국을 반석에 앉혔으며 제2의 건국을 완성했다. 당태종은 정관의 치로 역사에 널리 알려졌고, 명의 영락제는 비록 시신을 찾지 못한 조카 건문제의 행방을 추적하기 위해서라는 설도 있지만 남해원정을 전개했으며 중앙권력을 안정시켰다. 또 고려 광종은 노비 안검 법과 과거제를 시행했으며 조선의 태종은 중앙과 지방행정제도 완비 호패법을 도입했다.  


             

“왕자의 난 해결책?”     


태자 밀건 법은 자질이 우수한 황제를 제도적으로 배출할 수 있게 해주는 방법도 있었다. 예전처럼 어릴 때 태자가 책봉된다면 나중에 자라서 어떤 황제가 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태자 밀건 법을 취하면 비록 황제의 아들들만 후보로 한다는 제한적 선택이라 해도 오랜 기간에 거쳐 인물됨을 보고 나서 군주 감을 고를 수 있으므로 매우 합리적인 제위 계승이 이루어질 수 있다.


중대 이후 무능한 군주들이 연이었던 명 제국을 연상해본다면 그런 제도가 없을 경우 청도 역시 강희제와 옹정제의 안정기를 거치고 나서는 무능한 군주가 즉위할 확률이 높지 않았을까?     


왕자의 난은 역사 속의 사건 속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에도 되풀이되고 있다.

북한 정권은 3대째 세습되었고 남한의 재벌 기업들은 왕자의 난을 겪었거나

앞두고 있다. 혈통을 중시하는 낡은 전통이 바뀌지 않는 한 앞으로도 왕자의 난은 언제든 재점화될 것이다.     

군주가 절대 권력을 가졌던 왕조시대에는 태종이나 영락제 같은 출중한 리더가 나올 수 있었지만, 지금과 같은 공화국과 자본주의 경제에는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참고문헌-

시사에 훤해지는 역사 (남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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