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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May 07. 2020

게으름뱅이 경제

어렸을 적 엄마한테 자주 듣던 말 중 하나


 "너 같이 게으른 놈한테는 밥은 없다."


우리 집은 이상하게 늘어져 있는 그 행위가 허용되지 않은 집이었다. 마땅히 할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을 찾아서 해야만 잔소리를 듣지 않았으며,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정도에 차이가 있겠지만, 어느 부모가 자식을 가르칠 때 마음껏 게으르라고 가르치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부모가 자신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정리정돈 깨끗이 하고, 매일 지각하지 않게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물며 아이들이 자주 보는 동화나 속담 또한 게으름을 죄악시하는 작품이 많다. 개미와 베짱이에서는 "겨울이 오기 전에 열심히 일해야 얼어 죽지 않는다. "라는 교훈을 안겨다 주었고, 견우와 직녀 이야기에서는 일 안 하고 놀면, 일 년에 한 번 보는 장거리 커플이 된다는 무서운 감동을 주었다. 영화 [신과 함께]에서도 게으르다 죽으면 나태 지옥에 가서 무서운 가시가 박힌 수레바퀴에 깔리지 않도록 죽도록 뛰어야 하는 형벌을 받게 된다.


이렇듯이, 집안에서도 학교에서든 사회에서든 부지런함과 근면 성실이라는 가치를 우선시하고 그게 마치 당연한 가치인 듯 교육한다. 하지만 머리로는 아는데 나의 육신은 이를 거부한다. 집에만 들어가면, 아무것도 하기 싫고 마냥 누워 있고만 싶다. 침대와 나의 등이 N극과 S극이 된 듯이 그렇게 서로를 끌어당긴다. 학생이든 어른이든 누워있고 싶은 건 마찬가지다. 아니 우리 집 강아지도 똑같은 듯하다. 아침에 씻고, 출근 준비할 때 우리 집 강아지는 졸린 눈으로 스핑크스 자세를 취하며, 넌지시 나를 바라보며 눈 빛으로 말은 건다.


"어서 돈 벌고 와~  난 자고 있을게"


다음 세상에는 기필코 개로 태어난다고 다짐을 하면서 문 밖을 나선다.


그런데 게으름뱅이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


나는 더 이상 날씨를 보면서 빨래를 하지 않는다. 얼마 전에 장만한 건조기가 있기 때문에 굳이 말리고 거둬들이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 어떻게 건조기 없이 살았나 싶을 정도로 금세 적응을 했다. 또한 더 이상 마트를 가지 않는다. 꽉 막힌 주차장과 붐비는 사람들 속에서 쇼핑을 하다간 한두 시간은 금방 흘러간다. 그런데 쿠팡 새벽 배송을 이용하니 전날 11시에 주문해도 아침 7시에 받아 볼 수 있어 퇴근 후 장보는 시간을 아낄 수 있다. 혼자 사는 나로서는 요리하기가 여간 귀찮다. 식재료가 너무 많이 남고, 냉장고에 두었다 곰팡이 퓐 재료를 음식물 처리기에 넣을 때마다 한 숨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이제는 닭볶음탕을 해먹을 때도 재료를 따로 살 필요가 없이 간편 팩을 사고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된다. 마치 라면 끓이듯이 말이다. 운전을 할 때도 오디오 북으로 들으면서 이동한다. 이제 책도 눈으로 보는 시대에서 귀로 듣는 시대로 바뀐 것이다.


바야흐로 누워서 떡먹기 세상이다.


중국말로 "란런경제"라 불리는 이 게으름뱅이 경제는 개미와 베짱이 동화를 비웃기냥 한 듯 점점 쉽고 간편한 세상으로 바뀌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누워서 스마트폰을 하면서, 간단히 클릭 몇 번으로 음식을 시켜 먹고, 동시에 밀린 청소도 로봇청소기가 해준다. 인간의 신체 중 손가락만 있으면 되는 시대가 온 듯하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부지런함이 미덕이라고 배웠는데, 오히려 게으름이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 부모님들은 그렇게 부지런함을 강조했을까?  

어째서  부지런하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대체 언제부터 그랬을까?

정확한 답을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시간”이 어느 때 보다 중요하게 느껴질 때부터가 아니었을까?


수렵 채집인 시절 인류는 나무에 열린 열매를 따먹고, 사냥감을 찾아 멀리 이동해야만 했다. 그런데 사냥감이 매일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번 채집한 나무에서 다시 열매가 열리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그 시간 동안 마땅히 할 게 없다. 그럼 가만히 누워있거나, 기다려야만 한다. 마치 사자가 사냥감이 있을 때만 움직이는 것처럼, 낚시꾼이 입질이 왔을 때만 낚싯대를 낚아채는 것처럼 말이다. 서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농경이 시작되면서, 더 이상 인류는 베짱이처럼 열매가 다시 열리기를 노래하며 기다릴 수는 없었다. 개미처럼 1년을 일해야만 가을에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만약 인류가 베짱이의 DNA를 가졌다면, 지금쯤 멸종되었을 것이다.  농사일이란 해도 끝이 없고, 쉬어도 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때가 있고, 기간이 정해진 일이라 게으름은 곧 굶주림을 의미하는 단어였기에, 견우와 직녀처럼 놀고먹는 청춘들이 나와서는 아니 될 말씀이었다.

효율적인 농업 생산을 위해, 남자는 바깥일을 하고 여자는 안 일을 하면서, 바깥양반/ 안사람이라는 칭호가 생기기 시작했다. 각자의 역할에 맡게 손과 발을 움직여야만 입으로 뭐든 넣을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이제 "기계"라는 것이 나오고 "공장"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농촌을 도시로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예전에는 낮에만 일했다면 이제는 밤에도 일할 수 있는 도시 말이다. 아직도 시골에서는 밤이 되면 모든 불빛이 꺼진다. 내일 할 일을 위해 일찍 잠에 드는 것이지만, 도시의 밤은 여전히 환하다. 밤에도 해야 할 일이 있고, 먹고 마시고 놀 장소가 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은 시간을 낮과 밤까지 더 확장시켰고, 우리에게 더 일하고 더 소비할 것을 강요했다. 그만큼 일도 다양해지고, 바빠졌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보다 기계가 더 일을 잘하고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놀란 사람들은 처음에 기계를 부수는 듯 저항을 하기 시작했지만,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전보다 전문화되고, 바빠지면서 시간이 모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이점을 노리기 시작한다. 서비스업이 등장한 것이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셔츠를 세탁하고 다림질 해 입었다면, 이제는 세탁소에 맡긴다. 그만큼 시간도 벌고, 셔츠를 태워먹는 실수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머리를 자를 때도 미용실에 가서 자르지 내가 직접 자르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셔츠를 신경 쓰지 않고, 머리를 신경 쓰지 않고 출근을 할 수 있다. 그만큼 내 분야의 일에 집중할 수 있어 효율이 올라간다.


만약 내가 조금 부지런해서 텃밭도 가꾸고, 직접 장도 보고, 요리도 하고 청소 빨래는 물론, 머리까지 직접 자른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이 부지런한 일을 통해 벌써 농부, 마트 직원, 식당 주인, 세탁소, 미용실까지 5명의 실업자로 만들고야 말았다. 하물며 세상은 점점 자동화되고, Ai가 웬만한 일은 대체할 것인데, 여기서 내가 부지런까지 떨어 버리면,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살란 말인가? 더군다나, 요새는 코로나 때문에 장사도 안되는데 말이다.


이제는 사람과도 마주치지 않고, 주문을 할 수 있는 키오스크, 배달 어플, 심지어 온라인 수업 등. 코로나가 가져다준 영향으로 "언택트"가 대세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안 해도 굶어 죽지 않는다. 그대의 손가락만 있어도 말이다. 아 물론 돈도 있어야 한다. 게으르고, 돈만 있다면 이제 생존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하지만 손가락 까딱해서 오는 배달음식과 새벽 배송에는 여러 사람과 땀과 열정이 묻어 있다. 티브이 광고는 편리함과 즉각성을 홍보하지, 배달 오토바이가 겪는 사고와 물류창고에서 기한을 맞추다 과로로 쓰러진 사람들에 대한 뉴스는 1줄의 자막이 전부다. 나의 게으름이 누군가의 부지런함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숨긴 채 말이다.


편리함은 불편함을 이기기 마련이다.


자본주의는 언제나 시장에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고, 전에는 없어도 살았는데 이제는 없으면 못 살 것처럼 만들어 놓는다.

마치 내 손안에 떨어져 있으면 불안한 스마트폰처럼..


앞으로 사람들의 모습은 애니메이션[월 E]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저 누워서 먹고 쇼핑하고, 재미있는 쇼프로를 보지만, 넘어지면 자기 두 다리로 일어서지 못하는 그런 인류로 진화화지 않을까?

-영화 월e 속 장면-

                                                                                                   


어쩌면 벌써 온듯하다.


오늘도 유튜브 알고리즘은 나에게 오늘은 무엇을 먹고 마시고 어디에 놀러 가야 하며, 내가 어떤 차를 좋아하는지, 어떤 정당을 지지해야 하는지, 누구랑 친구가 되어야 하고, 누가 요즘에 가장 인기 있고, 누가 요즘에 욕을 먹는지 심지어 어떤 여자 스타일을 선호하는지 알려주기 때문이다.



굳이 불편하게 직접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으며 사귈 필요가 있을까? 직업과 재산의 정도가 아니라 어떤 영화를 좋아하고, 음식을 싫어하는지, 국밥 먹을 때 들깨가루를 넣는지 안 넣는지 까지 데이터가 있다면 말이다. 아마 불같은 호기심으로 시작된 사랑의 실패를 맛본 사람이라면 AI가 추천해주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을까?




다시 편리함은 불편함을 이기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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