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가 필요없는 묵묵함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 서평

by 제이티

유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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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도 있겠지요, 아빠. 하지만 제가 보기에 우리가 가진 거라곤 흙과 일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 말이 맞아. 하지만 그건 곧 우리 흙이 될 거야. 이제 몇년만 지나면 이 땅은 우리 것이 될거야. 중요한 건 우리에게 일을 할 만한 힘이 있다는 사실이야. 언젠가는 나도 클레이 센터 도살장에서 돼지를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때가 오겠지. 하지만 지금은 해야 할 일이기에 한단다. 그게 내 임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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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로버트의 아빠는 흙 속에서 돼지의 피와 땀 범벅이지만 비린 냄새가 밴 찝찝한 옷과 뻐근한 근육에 대한 불평을 한마디 내뱉지 않는다. 묵묵함으로 살아가는 로버트의 아빠는 머지않아 자신의 쓸모를 잃고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에 놓인 일을 해치워 나간다. 금수저를 빨며 태어난 것이 아니라 어느날 가난 속에 뚝 떨어진 것이지만 삶을 포기하거나 구세주를 기다리는 대신 아무리 직면하는 현실이 비참해도 이를 받아드리고 그 속에서 가능한 일들을 해내간다. 이런 아빠의 모습은 아들 로버트에게 깊은 존경을 얻어내고 경제적 여유와는 별개인 가족들의 인정을 받게 된다.


로버트의 아빠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천한 대우를 받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전세계적인 스타가 되어 억만장자가 되는 것이 성공의 기준이라고 부르겠지만 온 인생을 노동하며 살아 온 로버트의 아빠는 그에 밀리지 않을 만한 성공을 이룬 걸지도 모른다.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더라도 계속해서 페달을 밟은 대가로 인정을 받은 아빠의 삶이다.


학교에서의 소소한 불만들을 가족들에서 털어놓을 때, 나는 언제나 나의 학교생활에 대해서만 고민하기 마련이였다. 물론 아빠의 회사생활은 더 많은 문제들이 있을테지만 어쩐지 우리 가족은 누구도 이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쭉 아빠는 직장인으로서의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으셨고, 나 또한 직장인 아빠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았다. 내게 김치를 담구어 주신 아빠는 회사원이 아니라 유지민의 아빠였고, 그렇기에 중심 또한 나와 나머지 가족들이 였다. 묵묵하게 페달을 밝아오신 아빠에게 나도 로버트의 인정을 선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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