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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Jun 24. 2024

하늘색

하늘색


김민하


만일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신발을 신고, 같은 음식을 먹으면 어떻게 될까? 그건 완벽한 로봇일 것이다. 기억전달자의 마을에서는 그 수칙을 따랐으나 결국 꺠지고 말았다. 사람을 로봇화 시키는 건 그 사람의 본능을 모두 억제한다는 거와 다름없다. 내가 흥미 있는 분야를, 내가 못하는 분야를 오직 사람의 정신으로만 모두 100점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모두가 100점이고 우등생이면 다루기가 쉽다. 모두 쉬는 시간에 책만 읽을 꺼고, 모두 복도에서 100미터 팝스를 하고 뛰어다니지 않을 것이며, 모두 수업시간에 지우개 껍질에 쪽지를 넣어 선생님 욕을 하지 않을 것이다. 모두 획일화 하면 당장은 몹시 편해진다. 하지만 획일화 된 채 살아온 사람들은 더 이상의 발전이 사라진다. 안드로이드도 휴머노이드도 모두 사람이 점점 더 발전된 기술과 지식을 일일이 습득 시켜줘야지 알듯이, 누군가는 아이디어를 내고 그들에게 가르쳐 줘야한다. 키팅 선생님이 한 명 있어야지 지구가 돌아간다는 것이다. 로봇화를 없애기 위해 우리는 조금의 개성을 인정해줘야 한다. 예전에는 물감과 수채화로 3일을 넘게 작업해가며 고생을 하던 화가들이 이제는 '돈 들고 튀어' 라는 제목으로 빈 도화지 한 장을 약 1억에 팔았다. 하지만 예술대학교에서는 아직 현대 미술을 배우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작품을 비난하지 말고 한 사람의 개성이라고 인정해줘야 하지 않을까? 학교에서 여름을 맞아 서핑보드 위에서 파도를 즐기는 토끼 색칠하기 세트를 주었다. 대부분이 토끼를 어떻게 이쁘게 칠할까, 라고 고민하는 가운데 누군가 토끼의 귀를 댕강 자르고 토끼를 펭귄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서핑 보드를 버린 채 지슷한 사이즈로 니모를 그려 펭귄이 밟고 있게 하였다. 그러자 모두 똑같은 흰 토끼와 파란 파도 작품이 널려 있는 게시판 사이에 노을을 맞아 빛나는 핑크 파도 위에 니모를 타고 있는 펭귄이 만들어졌다. 분명 작품은 아름다웠고 개성 있었으나 아이들은 왠지 모를 이유로 그 작품을 욕했다. 왜 그랬을까? 언제부턴가 우리는 하늘은 파란색, 개미는 검은색, 유치원 생은 노란색으로 색깔 별로 나타내는 물건을 정하기 시작했다. 보통의 하늘은 파란색이었으나 어쩌다 보니 조금연한 파란색이 하늘색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하늘색을 달라고 말했을 떄 싫다고 하는 애들은 있어도 노을 색인 붉은 계열의 색을 주거나 먹구름 낀 회색 계열의 색 사인펜을 주는 아이는 없었다. 이미 연한 파란색을 하늘색으로 부르기로 결정이 난 사실이었고, 그걸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개성이 없는 하늘은 언제나 그 색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늘이 가끔 보여주는 개성이 묻어나느 색들을 아름다운 색. 이라고만 생각할 뿐이지 달리 생각하지 않았다. 획일성과 규격화가 되어 버린 교실도 마찬가지였다. 교실에는 항상 하늘이 있었고, 아이들은 하늘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걸 어길 수 있었으나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원하지 않고 따르고 싶지 않는다면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면 그만이었따. 더이상의 문제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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