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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Jul 02. 2024

달빛 아래에서 춤을

손정원


나는 어릴 적 유치원을 다닐 때, 엄청난 말괄량이였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나는 욕심이 많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바로 내팽개쳐 버릴 정도로 나만의 의사가 뚜렷했다. 나에게 있어 싫은 것은 싫은 것이고 좋은 것은 좋은 것이었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유치원의 법을 무시하고 여러 번 사고를 친 적이 많았다. 친구 장난감을 빼았는 일부터 갖가지 사고란 사고는 모두 쳐 부모님은 거의 매일 유치원 원장님의 전화를 받아야 했다. 친구들과 함께 장난을 쳐 한 학년 아래의 동생들 앞에서 벌을 선 적도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마냥 즐거웠다. 솔직히 나는 지금 그 때의 나를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좋은 건 좋다고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내가 좋았다. 그때의 나는 순수했다. 아무리 사고치는 나지만, 사람들은 나를 마음에 들어했다. 친근하게 대해주었었다. 그때는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그들은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얼굴을 찡그리며 맛없는 치즈 간식을 먹는 아이들과 다르게 토할 듯한 표정을 지으며 온갖 불평불만을 다하고, 다른 아이들은 좋아하는 사람 옆자리에 앉으면 부끄러워하지만, 나는 좋아하는 아이와 앉아서 기분이 좋다고 말하던 나의 모습이 부러웠을지도 모른다. 솔직하고 맑은 '아이다움'은 사람을 건강하게 해 준다. 내 마음을 말하고 나면 시원한 바닷바람처럼 푸르고 아름답게 변하며 숨쉬기 편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것은 어려서 가능했고, 어려서 멋졌던 것이었다. 중학교에 올라온 지금 내가 듣는 말들은 거의 비슷하다. "너 완전 순하다. 그러면 큰코다쳐', '사기당하기 딱 좋은 성격이네, 조심해야 해.', '너무 친절하게 하지 마. 안 그래도 괜찮아'. 배려심 깊은 사람. 이제는 사기당하기 좋은 사람이다. 나는 좋게 말하면 성격이 유해졌고, 나쁘게 말하면 기가 다 죽었다. 이제 유치원 시절의 나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초등학교를 지나면서, 나는 모르는 아이돌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음식을 싫어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원하는 곳에 안 가는 법을 배웠다. 유치원 시절의 나는 철들지 않았었다. 미안하고 말할 줄 몰랐고, 머리숙이는 법을 몰랐다. 다들 요즘의 나를 보면 답답하다고들 한다. 너무 맞춰준다고, 너무 착하다고. 거절하는 법을 알라고들 한다. 그런 말들을 들으면 나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고, 눈썹을 찡끄리며 아무 말 없이 웃는다. 내 인생의 모토는 '도움 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도움주고 살자' 이다. 이것은 그저 선한 마음에서 나온 것일까, 아니면 나만의 생존수단일까? 나는 도움주는 사람들을 많이 봐 왔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보며 좋아했고, 고마워했다. 나는 사람들의 그 존경스러움과 사랑의 눈빛을 받았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보며 학습했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를 점을 말이다. 경쟁하는 이 사회에서 나는 나만의 특별함이 필요했다. 그래서 사랑받을 수 있는, 조금 불편하지만 괜찮은 도움주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학교에서 화도 잘 안 내고 인성 하나는 착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친구를 맞춰주는 '착한 사람' 이다. 분명 마음이 시원해야 할 텐데 내 마음은 오히려 뒤엉키고 힘들었다. 이제는 사람들을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조용한 곳에, 나 혼자서 있고 싶었다. 착한 사람으로서의 삶은 나를 점점 지치게 만들었다. 최근에는 한계가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사람을 2시간 이상 만나면 지친다. 얘기하는 것이 두렵고 피하고 싶다. 이상하다. 예전에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정말 좋아했는데. 사회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 사회화가 된 나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뭔지 모르겠다. 좋아하는 음식을 말해보라고 해도, 좋아하는 색을 말해보라고 해도 무언가가 목에 걸린 듯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학교는 사람을 숫자로 평가했다. 그런 평가는 내 안에 숫자밖에 안 남도록 하였다. 학교 시스템은 분명 나를 좋은 사회인으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좋은 인간으로 만들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나는 줄곧 차가운 달빛 아래에서 춤추고 있다. 이 춤이 언제 시작되었고, 언제 끝날지도 모른 채 빨간 구두를 신은 것처럼 춤만 추고 있다. 이 사회라는 곡은 내가 살아있는 한 계속하여 재생된다. 고요한 달빛 아래에서는 달빛 아래에 있는 나만이 보인다. 하지만 달이 뜬 밤에는 모두 잠들었기에 나라는 존재를 봐줄 사람이 없다. 아침이 오기까지 기다리지만 그 때에는 형태가 없는 나는 햇빛의 그림자에 가려져버린다. 달빛 아래에서 지금도 나는 춤추고 있다. 아니, 모두가 춤추고 있다. 각자의 세계에서, 서로를 바라보지 못한 채 곡에만 집중하며 같은 춤을 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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