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윤
9월까지만 해도 숨이 차듯 더웠던 날씨가 엊그제 같았는데, 이젠 숨이 갈라지듯 추운 10월이 되자 무언가 적응이 안 되는 내 몸이 괜히 무겁게 느껴졌다. 꺼져가는 불씨를 다시 피우듯 손을 자연스럽게 비벼보니 어느새 이러한 겨울이 꽤 느리게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름이 간지 얼마 안 갔는데, 9월이 여름이었는데 가을만 쏙 빠진 듯 10월은 쌀쌀맞은 겨울을 그대로 나에게 재현시켜주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정말 언젠가 내가 사랑하는 겨울과도 이별을 겪게 될까, 여름이라는 계절이 다 삼켜버릴까 무서웠다. 어떤 계절도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듯 비웃으며 속삭이는 9월의 더운 날씨가 아직도 눈 앞에 아롱거리는 듯 하였다. 그런데, 이 계절을 만약 복제해낼 수 있다면, 다시 차가운 날씨를 영원히 볼 수 있다면, 여름 뒤에 바로 겨울이 오지 않게 할 수 있다면.. 어떨까?
언젠가 슬픔에 잠겨 나에게서 점점 사라져가는 것들을 다시 복제시켜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복제"라는 단어는 특정 무언가에게는 좋을지도 모르지만, 어딘지 모를 섬뜩한 분위기를 의도치 않게 연출하고는 하였다. 우리는 보통 좋아하는 것을 모방하려 애쓴다. 그러한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스타에 웨이팅으로 유명한 카페에서 이쁜 옷을 입고 사진을 찍은 인플루언서가 부러워 똑같이 따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 처럼. 자신이 동경하고 미치도록 아름답게 보이는 그 "매개체"를 모방하는 것이 잘못됨을 알면서도, 결국은 자신은 모방을 하지 않았다며 부인하기도 싫은 감정은 그에 따른 경쟁의식이 따르기 때문이다. 자신이 팔로워 수가 더 낮고, 친구가 더 높다면 "나"는 친구를 따라하고 싶어하고 그녀의 팔로워를 뛰어 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난 이 이론이 복제품과 비슷한 양상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작년에 나는 내가 좋아하고 사랑했던 물고기들을 떠나보냈다. 내가 동경하고 공감하던 "매개체"의 하나인지라 나는 예전부터 아빠에게 "그 물고기와 넌 정말 닮았다"라는 말을 자주 듣곤 하였다. 난, 그들을 좋아했기에, 모방하였으며 사랑했기에 그랬다. 그들의 죽음은 나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아빠와 엄마는 그들의 죽음을 달리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친 듯이 울어 제끼는 날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원래 인형에게도 이름을 붙여주고 아무도 말 하지 않던 방에서 혼자 웃고 떠드니 그냥 그려러니 했겠지만, 내가 그렇게까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잘 몰랐던 것이라고 혼자 조용히 판단해보았다. 그리고 난, 그들의 눈에서 "물고기는 언제나 복제될 수 있다"라는 일련의 믿음을 잠깐이지만 보았다. 뒤숭숭한 감정을 들추어낸 지금도 가끔 내가 사랑했던 물고기의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곤 한다. 그리곤 생각한다. "나에겐 기쁨이었겠지만, 너희들에겐 고통이었을 수도 있겠구나."
나에게는 오래전에 떠나보낸 "모르는 할머니"가 있다. 할머니의 말로는 "왕할머니"였다고 말하셨는데, 딱 한 번 만나본 적이 있다. 처음에 만났을 때는 "주름이 많았던 할머니"라고 나의 뉴런에 입력되었다. 그런데, 무언가 감미로웠다. 그때 만난 할머니는 무언가 오래전에 만난듯 익숙한 냄새를 지니고 있었다. 이건, 할머니들의 특유의 냄새를 띠고 있는 "향"이었다. 그 향을 맡다 보면 저절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분이 좋아지지만, 이것이 정확히 어디서 온 건지는 모른다. 그래서 더 매력적인 것은 아닐까. 그 향의 출처를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계속 맡고 영원한 비밀 속에 즐기고 싶으니까. 사촌동생도 까맣게 잊고 할머니와 같이 시간을 보내곤 했다. 비록 단 하루, 아니 단 몇 시간이었으나, 그 할머니의 막연한 향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물론 그 날 이후로 다시는 맡을 수 없었지만.
무뚝뚝하지만 편안한 얼굴로 내 얼굴을 쓰다듬으셨는데, 그 모습이 무언가 세상을 다 산듯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몇 달쯤 뒤에 들렸던 "왕할머니"라는 사람의 부고 소식. 나는 그 사람이 누군지 몰랐지만, 사실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혼자서 눈물을 줄줄 쏟았던 기억이 난다. 엄마와 아빠는 "뭐지, 뭔 상황이지..?" 라는 표정으로 앞만 보며 운전만 하고 있었고, 할머니도 적잖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휴지를 건네주었다. 사실 나는 그날의 내가 왜 울었는지 모를 정도로 이유 없는 눈물이라 스스로를 세뇌시키고 있었다.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는 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고 내가 왜 갑자기 눈물을 흘렸을까. 엄마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내가 죽으면 가장 차가운 바다에 뿌려지고 싶다"라고 말하였다. 난 비록 내일이 되어서 울음을 멈추었지만, 왕할머니라는 사람의 향은 아직도 은은한 캐모마일 티처럼 가끔 생각나게 만드는 향이다.
사람들은 욕망 많은 포식자이다. 자신의 반려를 계속 데리고 싶어하고, 이별을 원하지 않아서, 정말 옆에 같이 있고 싶어서 같이 죽거나 그나 그녀를 막대한 돈을 들여 복제를 하기도 한다. 사실.. 이렇게까지 복제를 반대하던 나라도 정말 슬프다면, 우울하다면 그 안건을 무언가 골똘히 생각해볼 수 있었을 것 같다. 비록 잘못된 것임에도, 정작 받으면 괴리감에 사로잡힐 거면서, "진짜"라고 느끼지 않을 거면서, 그러면서도 그들의 추억의 향과 냄새, 추상적인 무언가들에 사로잡혀 선택을 하는 일부의 사람들에게 무언의 동정을 주는 것은 왜일까. 아직도 궁금증이 풀리지 않은 "그 향"은 이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무언가 허전하고 쓸쓸한 기분이 들지만, 만약, 만약.. 미래에 인간을 복제할 수 있게 되는 세상이 온다면 난 복제를 하는 욕망많은 사람처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저렇게 멀리까지 보일 줄은 몰랐는데. 이건 마치… 마치…”
“사람의 일생을 보는 것 같지?”
“일생이라고?”
“강의 일생일 수도 있고.”
“강은 여기에서 태어나서 자신에게 주어진 거리만큼 흘러가지.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곧게 때로는 구불구불 돌아서, 때로는 조용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바다에 닿을 때까지 계속해서 흐르는 거야. 난 이 모든 것에서 안식을 찾아.”
“어떻게?”
“강물은 알고 있어. 흘러가는 도중에 무슨 일이 생기든, 어떤 것을 만나든 간에 결국엔 아름다운 바다에 닿을 것임을. 알고 있니? 결말은 늘 아름답다는 것만 기억하면 돼.”
“하지만 죽음은 아름답지 않아.”
“아름답지 않은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어가는 과정이겠지. 삶이 항상 아름다운 건 아냐. 강은 바다로 가는 중에 많은 일을 겪어. 돌부리에 강하게 차이고 때로는 자신을 가로질러 가는 물고기들을 만나고 강한 햇살을 만나 도중에 잠깐 마르기도 하고. 하지만 스스로 멈추는 법은 없어. 어쨌든 계속 흘러가는 거야. 그래야만 하니까. 그리고 바다에 도달하면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날 준비를 하지. 그들에겐 끝이 시작이니까."
비록 내가 떠나보낸 사람들이 그리워 눈물을 흘릴 수도 있고, 사진을 보며 추억할 수록, 점점 맡을 수록 사라져가는 그 향을 지키려 누구보다도 필사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다. 내가 만약 복제를 한다면 나에겐 새로운 행복과 희망이 생기는 것이지만, 그들에게 "끝"에서 시작으로 강제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 밖에는 설명이 안 되기 때문이다. 나의 행복을 전제로 그 사람들의 죽어가는 불행한 과정을 만들 수는 없다. 비록 "가짜"더라도, "진짜가 아니더라"도, 한 번 더 보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누르며 그저 사진을 바라보며 조용히 울음을 삼켜도 괜찮다. 그들의 영혼이 끝도 없는 영원히 광활한 바다를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언젠가 육지에서 가장 멀고도 고립된 지역인, 아무도 없는 평온한 "포인트 네모"에 다다라 영원히 행복할 수, 평온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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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알 상식 (글의 일부는 아님)
포인트 네모(Point Nemo; 포인트 네모)는 도달불능점 가운데 해양 도달불능점(The oceanic pole of inaccessibility)을 가리키는 용어로, 지구상의 어떤 땅에서도 제일 먼 바다 위의 지점이다. 네모(니모)라는 이름은 라틴어로 '아무도 없다.'는 뜻인 네모(Nemo)에서 왔으며, 쥘 베른의 《해저 2만리》와 《신비의 섬》의 주인공인 네모 선장에서 가져온 것이다.
예전부터 지구상에서 가장 외딴 곳으로 꼽혀 각국 우주센터에서 수명이 다한 위성을 폐기하는 일명 '무덤 궤도(Graveyard orbit)'로 써 왔으며, 1992년 크로아티아의 과학자 흐르보예 루카텔라(Hrvoje Lukatela)가 프로그램을 통해 밝히면서 유명해졌다. 그렇지만, 망망대해고 주변과는 약 2688km 이상의 거리 정도 떨어져 있어 사람들이 도달불능점으로써는 잘 탐험하려고 하지 않는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