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지호
삼다수라고 적혀 있는 생수 한 병을 사 물을 들이 마신 다음에 라벨지를 때지도 않은 채로 그대로 일반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는 사람들을 보다 보면 가끔은 투명 페트병을 손에 꽉 쥐고 있는 내가 초라해지면서 굳이 분리수거를 하는 이유가 있나 싶다. 심지어 미국은 국립 공공 시설에서도 쓰레기통이 하나라는데 말이다. 어쩌면 우리 인류는 점점 자연,그리고 숲과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만 같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아시타카는 숲을 지키려는 재앙신에게 저주를 받은 채로 인간과 숲,자연의 공존을 말한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숲에 빛이 들고 들개가 잠잠해지면 풍요로운 국가를 만들 수 있어. 사슴신의 피는 나병 환자들도 고칠 수 있어."라고 말이다. 그들은,에보시는 손에 라벨지를 땐 투명 페트병이 아닌 단단한 총을 쥐어 들었고 이내 숲에 한발,두발을 쐈다. 그렇게 인간과 숲의 갈라짐은 인간에게도,숲에게도 흉터를 만들어준다. 다시는 없어지지 않을 흉터를 말이다.
요즘 뉴스를 보다 보면 인류는 환경주의와 생태주의에게서 벗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만 하더라도 아파트 베란다 쪽에 있는 뒷산을 밀고 건물을 짓는다고 하면 아파트 주민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뒷산을 개발하지 말라고 하며 완강이 거절했지만 오늘날은 뒷산을 밀고 6층 규모의 정형외과 의원이 들어선다고 하면 발벗고 나서며 신나 한다. 이게 자연과 인간이 멀어졌다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 인간은 터널을 곳곳에 만들며 산에 개입을 극대화하고 도로변에 얇디 얇은 나무 한그루를 심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라고 말하게 된 것일까? 언제부터 인간은 자연과 시시가미와 갈라진 채로 가릴 수 없는 흉터를 석유로 만들어진 옷으로 애써 가리고 있는 걸까.
책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에서는 '환경 양치기'라는 표현을 쓰며 룰라 대통령의 연설을 인용했다. "부자 나라들은 아주 고상하고 그럴싸한 조약을 들이밀며 아마존 삼림 파괴를 막자고 웅변을 늘어 놓는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자기네 나라에서는 모든 숲을 몽땅 파괴하지 않았는가?"라는 말과 같이 어쩌면 모논케 히메에서 에보시가 숲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이유도,페트병에 딱 달라 붙어 뗄 때에는 손이 끈적끈적 해지기까지 하면서 뜯는 내가 미운 이유도 이런 환경 양치기에 따른 필연적인 환경 파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모두가 알다시피 친환경,SDG,재활용,탄소 중립 같은 그럴싸한 단어들은 모두가 다 동의하는 부분이다. 실제로도 그 어떤 누가 '북극곰이 살 곳을 지켜 주세요'라는 공익광고에 반기를 들겠는가. 사람들의 인식은 환경을 지켜야 한다이지만 생각과 행동은 정 반대이다. 인간의 이익과 발전,진보를 위해서는 환경 파괴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어쩔 수 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불 꺼,옷 입지마,종이 빨대나 써!"와 같은 강압적인 환경 양치기 소년,소녀에 의해 반감 심리가 생기는 것도 사실인 것 같다. 실제로 미국의 하원의원과 환경보호 민간 단체의 대표가 토의를 한 영상을 보았는데 환경 보호를 외치는 대표가 "환경을 보호 하기 위해서 플라스틱을 사용하면 안됩니다"라는 말에 하원의원은 "당신이 입고 있는 옷,안경,텀블러는 플라스틱이 아닌가요? 플라스틱을 안 쓰고 환경을 보호 하는 건 누구나 다 바래요. 허나 실질적인 대책이 있어야죠"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처럼 대책도,실질적인 방법도 없는 녹색주의자들에 의해서 사람들은 점점 더 페트병을 그냥 버려 버린다.
학교에서 나는 학생회로써 하는 봉사로 '지구 지킴이 캠페인'을 8시부터 8시 50분까지 팻말을 들고 서있던 적이 있었다. 교문을 지나 치는 학생들에게 "지구를 지키자!"라고 말하는 나의 모습은 꽤나 우습꽝스러웠다. 석유로 만들어진 나무 한그루와 맞먹는 후드집업과 교복을 입은 채로 '지구가 아파요' 문구가 새겨진 종이,그리고 플라스틱 팻말을 들이 밀며 남에게 환경을 지키라니. 나는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비환경주의이자 녹색주의자였다.
이런 내가 보는 아시타카는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기 위해선 타협과 양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자신의 저주가 새겨진 오른팔과 앙상하게 한그루만 남은 나무와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해야만 공존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에보시는 부정에 가까우며 모노노케 히메는 "널 좋아하지만 인간은 용서할 수 없어."라고 말한다. 이런 갈라짐은 분명히 흉터는 져,앞으론 영영 지울 수 없을 것이다. 허나 우리 인간들은 생태주의적으로 분명히 조화롭게 자연과 녹아들 책임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또 다른 흉터를 만들지 않기 위해선 아시타카가 말하는 대로 '양보'라는 걸 해야만 한다. 때로는 바로 지나갈 수 있도록 만드는 터널을 만들지 않고 S자로 빙글빙글 돌면서 주행한다던가,조금 비위생적이더라도 카페에서 빨대를 먹은 후 빨대를 반납하여 재사용을 하던가 말이다. 물론 불편하고 마치 손에 묻은 끈적 거리는 접착제 자국처럼 찝찝하겠지만 시시가미와 그 숲에 살고 있는 수많은 나무와 동물들,그리고 그 주위를 맴도는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라도 양보를 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아시타카가 공존을 말한 것처럼 말이다. 때로는 흉터도 가리려만 하지 않고 당당히 내보여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