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흉내내는 감자 (시사가 훤해지는 역사)
백지원
공부를 못해서 시험지를 한 줄 한 줄 찢어 맛살같은 형체를 띠게 한 채로 입에 넣는 내 친구들은 하나같이 ‘나는 그래도 선생님들의 인식은 좋다‘ 라고 말한다. 그와 반대로 남들에게 시험 점수 질문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평균을 알려줄 수 있을 정도의 나름 만족스러운 점수를 받은 나는 ’나는 그래도 수행평가랑 시험은 잘 봤다.’ 라고 말한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학교를 재학중인 학생들이라면 거의 다 알 것이다. 힘들게 머리를 쓰는 게 아니라 입과 표정을 사회에 맞게 움직이는 친구들은 생기부에 적힐 멘트들이라도 정직하게 적히길 바라는 마음 때문에 교무실 앞에서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그러나, 나와 같이 수행평가를 자신의 마음대로 체점하고 시키는 선생님의 뒤에서 작게 반발의 문장을 마구 내뱉는 경우에는 다르다. 수업시간에 수업을 잘 듣거나, 혹은 사교육 분야든 공교육 분야든 졸지 않기 위해 유당불내증의 증상이 나타나 배에서 진동이 마구 울려도 바닐라 라떼를 붙들고 있는 나의 모습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 나는 생기부에 적힐 멘트를 이길만큼의, 즉 내 성격을 봐줄 수 있을 만큼의 시험 점수를 받아 선생님들의 사랑을 다른 길을 통해 받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 두 상황들을 비교해보면, 우리들의 충돌 주제는 공부냐, 혹은 인성이냐 이다.
이 문제를 대학에 적용시키면 우리가 흔히 아는 수시와 정시가 된다. 정시파이터, 라는 단어를 들어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이는 21세기에 들어온 신조어로, 마치 선생님들에게 잘 보이려다가 참을 수 없는 일을 겪거나 혹은 내신을 보는 수시를 지원하려는 학생들에게 생기부를 협박물질로 삼아 수시 학생들을 복종시키는 행위를 보일 때 필요성을 보이기에 자주 등장한다. 왜 이처럼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자신의 권력을 내뿜는 상황에서 오히려 학생들이 필요해지고, 또 그 정시 학생들은 어떻게 당당하게 선생님에게 ‘선생님 너무했다’ 와 같은 반박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할 것이다. 그 이유는 정시를 지원하려는 사람들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을 통해 마치 체력을 비축해두었다가 마지막 라운드에 인생역전을 노려 페달을 꾹 누르는 라이더들처럼 수능에만 모든 힘을 쏟기 때문이다. 수능점수로만 평가하는 정시로 가게 되면 선생님들의 모진 생기부의 어떤 문구들도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에 대신 자신들이 방패의 역할, 혹은 때에 따라 선생님들의 의견으로 인생이 좌우되는 학생들의 말을 전하는 창의 역할을 맡기도 하는 것이다.
사실 정시파이터와 같이 자신의 의견을 사회적인 공간 중 하나인 학교 안에서 자유롭게 나눌 수 있는 역할을 보면 어떤 이들은 불만을 쌓을 수도 있다. 자신은 선생님에게 괜히 이름 한 번 불리지 않기 위해 1년 내내 교복만 단정하게 입고 다니는데, 막상 정시로 가는 학생들은 후줄근한 추리닝을 입고 등교하면서 다른 의미로 선생님들에게 이름을 더 불려도 웃으면서 유머있게 넘어가는 모습을 본다고 상상해보자. 어떻게 보면 교복을 제대로 갖추지 않는 것조차 학생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판단이 된다. 중학교에서조차 교복을 제대로 입지 않으면 선생님들의 시선은 ’인생을 반 쯤 놓은 아이‘ 라고 낙인찍는 눈길이 되고, 그만큼 자신이 학생임을 여러면에서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수능 마지막 시험 점수를 보고 ‘이 학생은 수능성적이 좋았으니 교내에서의 행실이 바르고 성실했을 것이다.‘ 라고 판단해버리는 색안경과 같은 대학의 입시 제도를 보고서 과연 열불이 나지 않는다고 설명할 수 있을까? 또 수능의 결과는 곧, 사교육을 통해 작년 수능 기출 문제들을 학생들에게 받아와 그 누구보다 자세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풀이해주는 선생님을 만나 얻을 수 있었던 결과라고 판단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모습은 수능 하루 전날, 선생님이 침을 튀기며 마치 뇌 속에 하나의 컨닝페이퍼를 심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여러 달 동안 성실하게 쌓아온 정직한 배경 지식으로 승부를 보는 학생들에게는 굉장히 불리한 상대를 만난 것과 같다. 게임에서도 돈을 퍼부어 부활카드가 여러장 생긴 계정과 매치가 되면 순간 의욕도 사라지고, 자신의 하찮함을 새삼 느끼는 것처럼 우리의 공부 환경도 비슷하다.
자신의 꿈을 위해서는 분야에 맞는 부분의 뛰어남보다도, 우선 유식함이 필요한 대학이던 아니던 평균 이상의 지능과 지식은 필수적으로 요구당하는 이 사회가 아무리 선생님들에게 대학을 가기에는 부적합한 이미지로 찍힐 가능성이 있는 나에게도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원하는 대학에 떨어져서 우울할 때, 남들은 그렇게 또 다른 수험생을 절벽으로 밀어내고 원하는 대학이라는 정상을 찍어도 결국 공부에만 매진하여 미처 생각하지 못한 자신의 흥미, 혹은 전문분야에 맞지 않는 길이라는 생각에 결국 학교를 그만두게 되는 그 상황 자체가 학교에서 열심히 가꿔낸 사람들의 열정과 노력을 조롱하는 행위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많은 불안한 부모들과 학생들이 모두 정시, 즉 공부부터 열심히 하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들조차 불안하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상위 1%만 갈 수 있는 피라미드 꼭대기는 모두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가장 정상적인 면을 보여주며, 안정적이고 당연한 목표가 된다. 그런 상황에서 수시를 통해 공부보다 자신의 흥미 분야에 더 시간을 쏟는 행위는 어떻게 보면 미래에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할 학생들의 어깨는 무거워질 뿐더러, 부모님들은 무엇보다 서울대 라는 이름을 미리 걸고 성적 부분에 지원을 많이 했기 때문에, 전에 쌓은 사교육의 비용을 어떻게든 보상받기 위해 공부와 아예 다른 방향으로 보내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무래도 도전정신이 필요할 듯 하다. ’채찍과 당근‘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들은 당근이라는 행복과 안정만 추구해서는 이 경쟁사회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새로운 도전을 통해 이뤄낼 수 없다면 죽는 운명 뿐인 불안감과 초조함을 끌어안고 채찍을 맞아야 하는 법이다. 이러한 행위를 판단하는 법은 아무래도 정시부분인 듯하다. 사복을 입으면서 선생님들과 생길 마찰에 대해 두려움 없이 맞서고, 새로운 분야를 개척함으로써 잃을 것 없어 온 몸을 던지는 그런 학생들이 현재 대한민국에는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학원에 의지하는 으스러지는 조그만한 감자같은 사람들이 할 일 중 하나인 노동과 단순반복 작업은 이제 ai가 전부 대체하게 된다. 똘똘 뭉치면 돌을 따라한 단단함을 가지게 된다 해도, 결국에는 혼자 있으면 쉽게 으깨지는 감자들에 불과한 약한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들은 아마 사복을 입는 학생들을 열등과 시샘의 시선이 아닌 다른 시선으로 눈 여겨 봐야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우리가 뒤에서 아무리 불공평하다 주장해도 떳떳이 대학에 들어가 졸업하는 그 강인함과 뻔뻔함이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감정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