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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서평 -날갯짓

by 제이티

<날갯짓>


홍지호



대부분의 매체에서 아이는 순백으로,어른은 얼룩으로 묘사 되곤 한다. 그 원인 중에 하나는 맹자가 말하였듯이 성선설에 의거하여 울거나 빵끗 웃어 보이는 아기의 표정이 이익을 취하기 위한,악한 행동이라는 규정을 도저히 할 수 없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현재에 들어서서 어른의 순수함이 유독 돋보이는 것만 같다. 나는 이를 인간의 순행적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어른들의 순수함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 걸까.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의 비순수함은 왜 생겨난 것일까가 궁금해진다. 이는 나의 학교 생활만 보아도 파악할 수 있는 진상이다. 오늘날의 아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책임 져야 할 요소들이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한스 기벤라트가 그만 칠판 앞에서 아무렇게나 칠판 위를 휘갈려 쓰던 분필을 떨어뜨린 뒤 주으려 몸을 굽혀 바닥에 무릎을 꿇었으나 결국 일어나지 못한 것처럼 학업,기대치,인생의 과도한 유년기의 집중 등으로 인해서 아이들은 본인의 몸에 맞지 않는 헐거운 상의와 하의를 입고 바짓자락을 바닥에 질질 끌며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게 선함이라는 걸 내면과 외부에서 강요 받으며.


나또한 마찬가지이다. 나 스스로가 책임져야 할 것들은 미래의 나,즉 어른이 된 후의 나보다도 훨씬 많은 것을 짊어져야 한다라는 생각을 종종하고는 한다. 당장 2달도 채 남지 않은 기말고사에 의해서 학교에서 단축 수업을 하여 3시 20분에 끝날 걸 2시 45분에 하교 종이 쳤다라고 하더라도 나는 도서관 3층 열람실 68번 자리에 앉아 오로지 사회와 나의 내면에서 하는 말인 규범을 지키라고 말하며 2-1 과학 오투 문제집을 책상 위로 올려둔다. 이는 결코 본인이 어린아이라는 자각을 할 수 없게 만들며 점점 더 책임져야할 것들이 많아지는 아이들은 위기와 몰락이 두려워 하나 둘씩 위기를,몰락을 피부로 느끼지 않기 위해서 안정됨을 원하며 그렇게 빅브라더의,주인의 낙타가 된다. 현재 아이들은 나를 포함해서 모두가 어릴 때부터 일찍이 책임을 져야하고 그 책임을 회피하거나 어물쩡 넘기기 위해서 본인 스스로 노예를 자처하며 이를 ‘선’이라고 포장한다. 이는 시험 30일 전 교실의 분위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시험기간에 엉덩이를 의자에 딱 붙여놓고 책상 위로는 여러 문제집을 올려두고 쉬는 시간,점심시간마다 연신 손을 바삐 종이 위에서 움직이는 것을 그들은 선이라고 규정하며 이를 배반하는 자에게는 “시험기간이잖아. 공부 좀 해라”와 같은 꾸중을 듣게끔 한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게임과 음악,춤보단 단정한 교복,무거운 책가방만을 중요시 하는 것 같다. 나는 이게 그저 옳다라고만 생각했다.


싱클레어는 태어나자마자 앞서 말한 한스 기벤라트와 똑같이 책임을 져야만 하며 남들보다,어른보다 몇배는 더 강한 중력을 견디며 유년 시절을 보낸다. 한스는 유망주,천재라는 말을 듣고 학교에 입학하며 여름 방학에도 잠을 줄여가며 언어 공부를 위해서 방의 불을 켜둔다. 마찬가지로 싱클레어는 기숙사 학교로 가며 열심히 공부할 것을 다짐한다.


“나의 위장,독수리의 위장이 아닐까? 무엇보다도 어린 양이 고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새의 위장임에는 틀림 없다. 나 무엇보다도 저 중력의 정령에 적의를 품고 있는데,이것이야말로 새의 천성이렸다.(…) 자체가 모두 하늘로 날아갈 것이고,그는 이 대지에게 가벼운 것이라는 새롭게 세계를 베풀 것이다. 타조는 가장 말보다도 더 빨리 달리지만,그런 그도 아직은 머리를 무거운 대지 속에 무겁게 처박고 있다. 아직 날지 못하는 사람도 이와 같다. 그런 자에게 있어서 대지와 삶은 무겁다. 중력의 정령이 바라고 있는 것은 그것이다!’


인간에게는 통상적으로 2번,삶에서 자기와 대화를 할 기회가 주어진다. 우리들은 이를 사춘기와 갱년기라고 부른다. 싱클레어가 크로머에게 휘둘릴 무렵 데미안을 만난 것을 우리들은 사춘기나 자아와의 대화라고 하지 않는다. 이는 그저 싱클레어가 일방적으로 데미안에게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럼 무엇이 싱클레어를 거울 앞에서 연신 눈물을 흘리게 하였고 거울 앞에서 마주 본 자신의 모습과 알에서 깨고 나온 본인의 모습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산출된 것일까. 싱클레어는 작 중 일생 중 3번의 대화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다. 첫번째로는 기숙사 학교에서 방황 하며 술이나 담배를 뻑뻑 피며 한번만 더 담술을 마시면 기숙사 퇴실 조치였던 순간이고,두번째로는 베아트리체를 만났을 때,위버멘시의 길이자 날개를 가지고도 중력에 부딪혀 날지 못하였던 타조가 고개를 위로 보게 된 기회인 아브락사스와의 만남이다. 여러 술집과 좁은 골목길을 오가며 한껏 흐트러짐이 무엇인지를 배웠고베아트리체를 통해서 따뜻함과 올바름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이는 흔히 우리가 이야기 하는 두가지의 세계인 선과 악을 몸소 체험한 순간이였다. 그리고 마지막은 알을 깨고 나온 순간인 선과 악은 그저 허울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 아브락사스를 인식하게 된 순간이였다.


그렇게 싱클레어는 타조에서 독수리가 되어 날갯짓을 하는 법을 배우며 ‘하늘을 날아도 된다’라는 새로운 규칙을 창조하였다. 그러나 아까도 말했다시피 현재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 학생들은 독수리가 될,날갯짓을 할 기회조차를 박탈 당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데미안이 우리나라에서 잘 팔리는 이유는 그 대척점에 우리나라가 서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처럼 우리나라의 아이들은 거울 앞에서 날갯지을 두번,세번 연습할 기회가 없으며 날개로 가벼움을 연기하며 날갯짓을 하는 것보다 그 면적이 넓은 날개로 더 많은 짐을 실기를 원한다. 오죽하면 학교에서 조금이라도 불만 섞인 말을 하면 선생님들께서는 “얘 너 사춘기니? 원래 너 안 이랬잖아” 입에 달고 사는 걸까. 그렇게 아이들은 진정한 어린아이가 되지 못한 채로 소위 ‘마마보이’나 ‘캥거루족’과 같은 우물 안 개구리이자 아이일 때 어른의 옷을 입고 비로소 어른,성인이 될 때에는 진정한 자신을 찾지 못해 회사에 기생하여 본인의 가치를 만드려 든다. 낙타가 되고 싶다고 빌며 말이다. 참으로 비참한 인생인 것 같다.


그렇게 한 인간은 신과 주인을 기다리며 본인을 거둬 주기만을 바란다. 데미안의 초반에서 싱클레어가 데미안에게 크로머를 무찔러지기를 비는 것처럼 말이다. 마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공이 “내일 잠에서 깨어나면 오늘 일을 어떻게 말하게 될지? 내 친구 에스트라공과 함께 이 자리에서 밤이 올 때까지 고도를 기다렸다고 말하게 될까?”라고 말한 것처럼 몸만 큰 어린애나 어른임을 강요 받은 어린애는 고도 아저씨를 기다린다. 사회는 그리고 개인은 이를 선으로 포장한다. 고도 아저씨를 기다려야 착한 어린이라는 말로 말이다. 나는 선악의 탈피가 이 사회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근본적 해결이라 생각한다. 이는 아폴론적 세계와 디오니소스적 세계를 선과 악으로 규정 짓는 본 사회를 보면 아주 적나라 하게 들어난다. 나는 장난 삼아 같은 학생회 친구가 체육복 바지에 상의는 사복을 입으면 ‘양아치’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교복을 바르게 입어요 라는 규정에 나는 몸을 담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자신이 입고 싶은 대로 교복을 입는 게 과연 나쁜 것일까? 그저 규범을 지키지 않은 것에 그치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나를 지배한다. 나도 비로소 아브락사스를 만난 것일지 고민이 되기도 한다. 청학제라는 학교의 행사에서 같은 학년끼리만 체험할 수 있는 부스에서 멋대로 1학년 5반이 운영하는 부스로 가 줄을 서고 있었던 것만 보아도 나의 규범도 어느 정도 해소된 것일까. 어쩌면 어른이 되어가면서 반항을 하고 야자를 째고 술 담배를 하는 건 자유를 찾는 것이자 자기 자신과 마주하여 자아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 아닐까. 나는 이를 순행적 성장이라고 말하고 싶다. 진정으로 어린 아이에 걸맞는 건 엄마의 등쌀에 떠밀려 영어 유치원에 다니는 김라온(6세)가 아니라 하고 싶은 대로,먹고 싶은 대로 밤을 새며 PC방에서 리그 오브 레전드를 돌리는 박성준(24세)가 아닌가. 본인 스스로 밤 새서 게임을 해도 된다는 새벽의 무한함을 세상에 가져다 준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계속해서 하나의 세계가 말하는 정직함과 올바름에서만 살았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어른을 표방하였지만 나의 표지는 사자도,어린아이도 아닌 낙타에 머물렀으며 이는 곧 나는 태양만큼이나 뜨거우며,타조만큼이나 빨랐지만 결코 나 스스로가 태양계를 만들고 행성을 지위한 게 아닌,스스로가 얇디 얇은 발로 발재간을 통해서 빨리 달리는 게 아닌 그저 태어났을 때부터 그랬다. 어른들을 보면 한 분씩 인사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느 정도였냐면 정자에 할머니,할아버지들이 모여 계시면 어릴 적,싱클레어였던 나는 태양의 세계에 갇혀 깜깜한 밤 태양보다 더 환하게 비추어 주는 은하수 빛을 볼 수 없었던 나는 할아버지께 “한번만 인사해도 돼”와 같은 꾸중까지 듣기도 했다. 지금의 내가 보면 나름 우스운 일이지만 나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얼마 전에 선생님께서 나를 불러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전에는 안 그러던 애가 요즘따라 수업 시간에 자꾸 조네? 그러면 안되는 거야 지호야”라고 말이다. 교무실에서 물론 나는 표정을 숨겼으나 들뜬 내 마음의 날갯짓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가 조금은 규칙을 어길 줄 아는 아이로,어린아이로의 한발짝을 다가선 것 같아서 말이다. 나의 순행적 성장은 아마 지금부터 시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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