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베르테르 슬픔
정서윤
"모든 것을 갈망하고 원하는 시기에 나와 신의 첨예한 대립을 구경으로 삼아 오는 사람들은 많았다. 신은 나에게 제한된 규칙성과 통제, 멈출 수 없는 희망을 주었으며, 나 또한 신에게 인간의 근성을 보여주었으며, 사람의 시선들을, 따가움을 선물로 주었다. 그럼에도 난 신을 이길 수 없었고, 사람들은 한 인간의 잔혹한 승리를 원했으나 지나친 손해를 보고 간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아쉬움의 잔상을 하늘에 아로새기듯 발걸음을 집으로 재촉하였다. 신이라는 것이 정말로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오산이란 것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결국 실패하는 것이 인간의 어중간한 성격을 만든다는 생각에 굴욕을 곱씹듯 느껴보았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빌헬름에게 알려주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여기서 베르테르는 자신이 가질 수 없었던 여자, "샤를로테 부프"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미약한 영향을 촉망받는 세상에 미치게 되는지를 알게 된다. 이는 마치 바흐와 헨델의 역사와 같다. 그들은 태어난 시기와 나라, 성공한 시기와 죽음의 방법까지 거의 일치했지만, 바람처럼 지나간 그들의 인생에서 죽음의 방법은 끔찍하였다. 아무리 진정으로 성공한 음악가라도 자신의 "노안"만큼은 해결할 수 없는 과제로 남듯, 영원한 불멸을 누리고 싶어했던 진시황처럼 서양의 음악가들도 눈을 고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다 사기를 치던 의사 "존 테일러"라는 의사에 의하여 카우칭이라는 수술을 받고 영원히 실명을 한 바흐와 헨델은 테일러의 배신을 참지 못하고 몇 개월 안에 사망하고 만다. 이렇듯 사람은 욕망에 가득 차있고, 마치 조용한 학교 안에서 울리는 바이올린 소리의 메아리를 듣듯 하나의 행동들도 남김없이 태워서 충족시켜야지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본능과 충동이라는 요소는 우리에게 심미적 갈등을 주는 요소이다. 신은 나에게 "갈망"이라는 본능을 주었고, " 욕망과 사랑"이라는 충동을 주었다. 욕망의 예시는 <헤세가 들려주는 나비 이야기>에서 그 욕망의 실현을 자세히 볼 수 있다. 하인리히의 광적인 나비 수집과 에밀과의 갈등, 결국은 양심을 지키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워 자신이 수집한 나비를 모두 부스러뜨려 없애버리고 마는 비극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그는 무엇을 원하기에 대립을 원하는 나에게 이러한 감정을 다스리라 했던 것일까. 신은 그래서 우리에게 희망고문이라는 요소와 그를 향한 정확한 규제의 성질을 추가적으로 주었다. 이를 다스리는 것을 통해 신은 교활하고, 인간을 놀려먹는 단순 재미 충족을 위한 목적으로 인간의 욕망을 이용하는 듯 하다. 신과의 대립은 쉽지 않은 요소가 될 수 있다. 처음에는 신의 가호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행복해하던 베르테르도 결국은 신의 의도에 좌절감을 느껴 죽은 것 처럼 말이다.감정적인 본능의 충돌과 이성적 규제의 충돌은 어찌보면 당연한 인간의 본성을 따지고 있는 걸 수도 있다.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앞서 말했듯이 인간 욕망의 파괴를 보고 싶어 하는 교활한 신의 술수라고 기억해두면 좋을 것 같다.
베르테르는 진정한 사랑을 하였다. 신의 교활한 술수에 관해서는 잠시 배제하고 보자면. 세계적인 대문호 괴테는 평생 여러 여성들을 사랑했는데,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나 불륜 등 다채로운 여성 편력으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처음에 이 책을 읽을 때는 그러한 생각이 들지 않았으나, 그의 과거를 알아버린 뒤로는 그가 하는 행동들에 마치 잘 돌아가는 톱니바퀴에 나뭇잎이 끼인 듯 삐걱대는 듯 하였다. "원래 그랬던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추가되면서 괴테라는 글자에 하나의 먹물로 이뤄진 획이 그어지고, 자신을 드높이던 명예가 한순간에 추락하는 것을 괴테는 느꼈을까. 자신의 "로테"를 향한 이뤄질 수 없는 사랑만큼이나 이루기 힘든 "권력 유지"의 비결은 자신의 괴짜같은 글 실력이었을까 , 아니면 사람들의 "쟤는 원래 괴짜같아서"라는 약간은 안도의 뜻을 표하는 수식어 덕분이었을까.
어쩌면 그는 더 이상 상처를 받고 싶지도, 모진 말로 로테를 울리고 싶지 않았기에, 자신의 망상된 로테의 모습을 사랑했을 수도 있다. "우리 이대로" 라는 뻔한 구절을 속삭이며 침대에 눕는 나날들이 묘사되는 것이 끔찍할 만큼 괴로웠을 시간들. 그 흔한 거짓말을 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얼굴을 갈망하며 가질 수 없다는 죄책감과 체념감에 사로잡힌 괴테는 결국 최후를 맞이하는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로 "로테"라는 우리가 믿는 우상이다. 그 우상은 가질 수 없는, 욕망의 우물로 가득 찬 살아있는 날 것의 생명체라고 책에서는 명시되었지만, 만약 자신의 우상이 사망하거나 혼을 신에게 빼앗긴다면, 그를 우상으로 삼았던 팬들과 여러 동경자들까지도 같이 자살하는 현상이 있다. 그 현상을 "베르테르 효과"라고 칭하며, 우상을 잊을 수 없어 가는 길까지 함께하겠다는 극단적인 진심을 보일 수 있는 방법이다. 우리도 욕망 앞에서는 절대적으로 우아해질 수 없다는 것을 성찰하는 시간이었다.
보통 이러한 욕망을 느끼는 사람들은 남몰래 이것을 억누르고 살라고 하지만, 난 이것을 억누르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남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고유적인 특성에 실금이 가는 행위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비록 이로 인해, 예를 들어 욕망으로 인한 감정변동이 심한 사람들로 인해서 사회에서의 감정적 영역이 요동칠 수는 있으나, 이를 가지고 나라의 안정을 위해 폭주된 뇌를 잠재울 필요는 없다고 난 제발 굳건히 믿고 싶다. 물론 그렇게 되는 것이 현실로써는 불가능하지만, 만약 내가 그 정도로 폭주를 한다면 한 번 아무런 제재도 받지도 않고 그 잠재력의 불태움을 마치 불멍처럼 가만히 지켜보고 싶기 때문이다. 사회는 "천재, 문제아"를 동등하게 보는 경향이 조금씩 있기에, 이러한 천재적인 행동이 어쩌면 문제아적 행동으로 간주될 수는 있다. 그렇지만, 호르몬의 문제가 자신의 잠재력의 요동침을 뜻할 수 있고, 사회적 제재에 대한 반항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기에 그냥 놔두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한다.
베르테르는 우아한 욕망을 로테에게 최소한적으로 표현하려 애썼다. 로테에게 그러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금기시된 것이자, 해선 안된다는 이성적인 규제의 비율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와 신과의 대립에서 신은 인간의 그 우아한 욕망의 "우아함"이라는 요소 자체를 파괴하려 애썼던 것은 아닐까 싶다. 몽상 같은 하늘과 별들을 내 품 안에 안듯, 지금 이 시간이 멈추면 좋았을 듯, 인간의 망상력은 상상력을 넘어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적 특성을 초월하는 능력이 될 수 있다. 결국 베르테르는 신에게 항복하였다. 로테를 향한 에로스의 사랑의 화살처럼, 유혹되고 매혹되어버린 베르테르의 우아한 욕망을 지키려는 이성적 규제는 결국 감정적 욕망에게 패배해 어딘가에 박혀서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폭주하는 그 "우아한 욕망"이었던 것은, 결국 베르테르에게 실연과 아픔을 안기고 결국 죽음이라는 최후의 편안함을 선사한다. 우리도 어쩌면 "우아한 욕망"을 표현하고 있지는 않을까, 이혜롭지 못한 상처가 생기도록, 욕망이 폭주하도록 내버려둔 상태는 아닐까, 애처롭게 질문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