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영
현자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우매한 자들은 그 손가락을 쫓아간다. 아니, 때로는 그 현자의 손가락을 보며 현자를 욕하기도 한다. 그것이 세상의 진리다. 아니, 세상의 진리가 아니라 모든 일에 부합하는 이치다. 찰스라는 현자는 꿈을 향해 쫓아가고 그 꿈을 이루는 자아실현을 성공시켰을 때 장렬하게 산화하라는 짧고 굵은 인생을 우리에게 가리켰다. 하지만 우리는 그 현자의 투박했던 손가락을 본다. 현자 찰스 스트릭랜드는 불혹의 나이에 그림을 위해 타히티로 떠났다. 아내와 두 자녀를 가진 가장은 편지 한 장과 함께 돈과 재산을 남겨두고 여행용 보스턴 백 하나만을 들고 타히티로 갔다. 그 보스턴 백에는 비자금으로 숨겨둔 금괴와 현금 뭉치는 없었고, 약간의 현금과 여벌의 옷, 그리고 그림을 그리기 위한 그림도구만 들어있었다. 그렇게 찰스는 물에 빠진 사람이 물에서 헤어나온다는 생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코로나 시가를 피우며 그림을 그린다. 눈이 멀었다. 모기에게 물려 발생한 말라리아와 풍토병 장티푸스가 함께 현자의 몸을 뜯어놓는다. 하루 종일 병마와 씨름하고 제대로 된 해열제도 없는 마당에 실명이라는 거대한 재앙 역시 찾아온다. 눈이 보이지 않고 보인다해도 모든 것이 뿌옇게 보인다. 찰스 스트릭랜드는 그런 와중에도 본토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붓을 집었다. 오직 손의 감각에만 의존해 그린 그 그림은 역작이었다. 천재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그리고 현자 찰스는 편안하게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한다. 그 그림은 다른 누군가가 비싼 값에 가져가든 아니면 그곳에 자신의 유골과 함께 남아 함께하던 상관이 없다. 아니, 오히려 후자가 더 좋을 것이다. 그렇게 찰스는 역작 한 개와 함께 쓸쓸하지만 쓸쓸하지 않은 죽음을 맞이했고 그것이 바로 현자가 가르킨 달이었다.
나는 정확히 나에게 있어서 ‘그림’ 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이제 조금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지만, 작년 이맘때쯤만 해도 나에게 있어서 그림이라는 것은 ‘밀리터리’ 라는 다소 마이너한 취미였으니까. 그것은 남들과의 교집합이 하나도 없는 취미였으며 오직 그 취미를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은 몇 사람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몇 사람과의 관계가 틀어지고 나니, 정말로 아무도 내 곁에 없었다. 남들은 해외축구를 보며, 작년 이맘때쯤 일어났던 비극인 맨유 챔스 조별 탈락에 대해서 텐하흐의 경질이다, 아니 유임이다, 로 논쟁을 벌일동안 나는 F-35의 국내도입 분량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나를 친구로 보지 않았고 나도 그들을 친구로 보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한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니 들어갈 다른 무리가 없었다. 그것이 싫었다. 고독. 나는 현자가 달을 가르키면 그 손가락을 보았기에 자아실현의 고독한 길을 감당할, 그런 용기는 없었다. 그저 현실에 놓인 가장 효과적인 수단인 돈이 좋았고 그 돈을 좋아했기에 돈과는 다른 길을 가는 찰스를 나는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저 책임감이 없는 최악의 가장으로 바라보았을 뿐. 가정경제에 돈을 가지고 옴으로써 내조하는 아내와 함께 올바른 자식교육을 하는, 그런 틀에 박힌 가정관으로 바라보았을 때 찰스는 가정경제 악화의 주범이었고 가정 경제는 가장이 책임져야 될 부분이라고 생각했기에, 찰스는 일종의 ‘상관 명령 불복종’ 이라는, 남한산성에 갇혀야 될 일을 저지른 사람이기에 나는 찰스를 그다지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내가 작년 이맘때쯤 벌어진 참사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챔피언스 리그 조별 광탈에 대해서 열띈 토론을 벌인 이들을 친구로 보지 않고 그들도 나를 친구로 보지 않듯이, 나는 찰스를 하나의 목표에 눈이 먼 우매한 자로 보았고 찰스 역시 나를 현실밖에 모르는 ‘고리타분한 현실주의자’ 라고 생각하며 우매하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 투박하고 거친 손가락을 보고 난 현자를 욕하고 있었다.
나는 돈이 좋았다. 돈으로 살 수 있는 많은 것을 그렸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비싸다고 하는 청담동 한강뷰 아파트에서 매일 아침 늦은 브런치를 먹고, 벤틀리를 타고 내 사업체로 출근해 일을 하다가 일찍 퇴근해 여가를 보내다가 잠에 드는, 그런 여유로운 일상을 그릴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이었고 때로는 사업체 없이 돈 많은 백수, 라는 나태한 삶을 꿈꾸기도 했다. 그런 상상에는 언제나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돈을 좋아했다. 돈이 일종의 친구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정도 찰스의 마음을 알 것만도 같다. 무언가 하나, 미치도록 좋아하는 것이 있는데 현실이 그것을 막고 있는 것. 나는 이제 그 심정까지는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이제 현자가 가르키는 손까락의 끝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달을 보았다. 현자의 거친 손가락을 보며 그 현자의 뒷배경을 욕하지 않았다. 현자의 손가락 끝에 뭐가 달려있는지 궁금해하지만 우매한 뇌로 알 수 없어 현자를 알 수 없는 천재라고 생각하던 시절을 넘은 것 같다. 내 입으로 그런 말을 하긴 그렇지만, 달을 보았다. 찰스에게 있어서 그림은 나에게 있어서는 ‘축구’ 라는 스포츠였다. 내가 또 언젠가 바뀔 취미를 두고 하는 말인지는 몰라도, 그것은 나의 달이고 현자가 가리킨 보름달이 아니라 새로운 블루문인 것 만 같다. 내가 속으로 호감이 있는 여자애에게 중거리 프리킥을 보여주고, “어때, 나 잘 차지?” 라고 물어보았을 때 그 궤적이나 힘, 속도에 상관없이 “와, 너 잘찬다” 라는 대답을 들어도 이제는 상처받지 않는다. 그저 손흥민 같은 궤적과 루니 같은 슛 파워에, 호날두 같은 슈팅 폼이 있었다는 대답을 기대했지만 그런 대답이 나오면 더 좋고, 안나와도 상관 없다. 아니 이제 그런 애들에게 슈팅 하는 것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연습이나 공식 때 친구들 옆에서 보여주고 그 친구들도 딱히 평가하지 않고 경기에 집중한다. 이제 누군가에게 보이는 허례허식보다는 내가 원하는 슛 폼을 선호한다. 불이 붙은 것처럼 발목에 힘을 주고 차는 정확도 낮은 슈팅보다, 느리고 멋 없어도 골대 앞에서 안전하게 넣는 것을 선호한다. 그리고 공미나 미드로 플레이할 때는 안정적으로, 그런 식으로 진행하고 내 본 포지션인 수미로 뛸 때도 이제 플래시한 태클은 걸지 않는다. 볼도 무리하게 패스하려다가 미스를 내지 않고 선배들의 눈초리도 무섭지 않다. 왜 볼을 돌리냐고 할 때 실점보다는 한 템포 늦추는 것이 낳지 않겠냐, 라고 웃으며 대화하면 뭐, 그렇게 해서 이기면 됐지 라는 식으로 포기하게 되어있다. 발을 뻗다가 당하는 퇴장도 이제 조금 준다. 무리하게 내 영역을 넓히고 공격가담하지 않고 중원에서 풀어나가는 식으로, 가끔 중거리나 PK를 내가 차는 방식으로 득점 욕망은 체운다. 예전처럼 무리하게 1대 1에서 득점하려고 뚫으려는 시도는 안한다. 그리고 그러다가 발생하는 빈틈을 무리하게 발을 뻗어 막다가 당하는 퇴장도 준다. 그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달이었고 찰스가 가리킨 달과는 다른, 블루 문이었다.
달을 보았다. 돈을 좋아한다. 하지만 좋아한다고 해서 집착하진 않는다. 옥상에 올라가서 공허한 느낌은 싫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용기는 조금 얻은 것 같다. 축구를 통해서 말이다. 그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달이었다. 원하는 것을 할 용기. 그것 말이다. 이제 무리한 공격가담으로 인한 실축, 퇴장 대신 안정적 수비 조율, 그리고 수비라인에서 받은 볼 윙으로 배급, 그리고 중원에서의 볼 조율, 공격 가담은 중거리를 찰 수 있는 구역에서만 하면서, 내 욕심을 줄이고 내가 하고 싶었던, 레알마드리드 카세미루 플레이를 실현시키고 있는 것 같다. 재능은 없지만 하고 싶은 것은 한다. 그리고 돈을 좋아한다고 해서 집착하지 않으며, 하고 싶은 것을 진행할 용기를 조금이라도 얻었다. 그것이 나의 달이었고 현자 찰스의 달과는 조금 다른 블루 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