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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진실은 침묵에

아비투스

by 제이티

백지원



친구들과 용돈에 관한 얘기를 나누었을 때, 나는 굉장히 난감한 느낌들을 받았었다. 아무래도 학교라는 작은 사회 내에서 많은 종류의 학생들을 만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다보면 돈이 없어보이는 부류의 친구들도 굳이 깊게 파고들지 않아도 알아차릴 수 있었고, 그저 지나가는 걸음걸이, 젓가락질, 연필 잡는 손모양만 대략 흘겨보아도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이처럼 사람을 볼 때, 내가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부유함의 정도’ 였던 것 같다. 물론 가장 흔하게 그 부유함을 알아차리는 방법은 겉으로 보이는 외적인 모습, 즉 입는 옷의 브랜드나 사용하는 핸드폰과 같은 것들이다. 내가 자연스럽게 이런 것들을 의식하게 된 이유는 잘 알지 못하겠지만, 이렇게나 돈이라는 분야에 대해서 많은 관심이 쏠려있던 탓에, 나는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나의 용돈 금액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누구는 한달에 70만원을 사용했다는 소리가 들려오는 가 하면, 각자 자신의 이번 한달 계좌 내역을 확인한 후 자신이 가장 돈을 많이 썼을 때에는 얼마를 사용했는지와 같이 전부 자신의 부를 보여주기에만 바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돈이 필요할 때 용돈을 받았던 입장인 나는 딱 달이 시작되었을 때 받는 기본 금액 5만원을 제시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속에서 받을 무시의 시선들은 늘상 나를 기죽게 만들었다. 필요할 때 돈을 받는다는 뒷받침 내용을 서술해도, 사람들은 숫자만 기억하니까, 별 효과는 주지 못했다. 분명 필요할 때 돈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풍요로운 것인데, 살만한 것인데, 충분한 것인데, 사람들은 살 만 하다는 그 어정쩡함을 가난이라고 치부하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중학교 2학년의 나이에는 굉장히 크고도 남을 법한 15만원의 용돈을 받게 되었고, 나는 또 그 이야기를 또 남들과 같이 자랑하듯 말할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신의 수준과 능력 등을 내면 밖으로 표출하여 방어기제를 만들고자 하는 본성이 있으니 말이다.


이 상황 속에서 생기는 것이 아비투스 라는 키워드이다. 설명하자면 이 사회 속에서 여러 상호작용을 하면서 생기는 꾸며진 취미 혹은 습관 같은 것들을 뜻한다. 상호작용이라는 것은,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공통적인 화젯거리나 주제 혹은 관심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위에서 말한 ‘꾸며진 취미 혹은 습관‘ 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과 서로 자신의 급과 수준이 이 대화에 끼지 못할 정도로 낮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한 한가지의 수단이 될 것이다. 흔히 아이돌 관련 흥미나, 아니면 화장품, 혹은 옆반 친구들간의 다툼 뒷이야기 등등처럼 말이다. 아이돌에 관해 이야기 하면서 자신이 이 아이돌을 좋아하고, 요즘 말로는 덕질을 하면서 거액을 쏟고 있다는 것을 은근슬쩍 과시하며, 자신의 파우치에 들어있는 10가지 이상의 화장품에 관련해 이야기를 꺼내면서 이건 얼마며, 틴트를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또 집에 몇개가 더 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로 또 다시 자신의 용돈 사용의 일부를 설명해준다. 옆 반 친구들간의 다툼 뒷이야기는 앞에서 말한 재력과는 조금 거리가 먼 과시로, 자신이 너도 모르는 이야기를 알 만큼 이만큼이나 발이 넓고,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외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마음껏 그 이야기들을 조잘조잘 댄다. 우리는 전부 이런 무리나 대화에 끼기 위해 아비투스, 그러니까 모두와의 공유된 관심사를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지만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들을 자신조차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이처럼 옛날 중세 귀족들의 경우에도 이러한 아비투스가 존재했다. 위에서 설명한 우리들처럼 급을 나누기 위해 생긴 취미가 바로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었는데, 점점 사회가 복잡하게 돌아가면서 지식의 총량과 깊이, 즉 알아야 할 것과 그것이 지닌 깊은 뜻을 발견하는 능력들이 사회적으로 부를 누리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이 필요해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어쩔 수 없이 그 많은 지식들을 저장하고 익히기 위해 사용되는 돈이 늘어나면서 점점 자신의 의지를 통해 마련할 수 있는 양을 초과해버리게 된다는 문제점이 발생하게 된다. 이 현상들은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과 매우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시험 공부를 할 때, 많이들 자습서나 평가문제집을 사고는 하는데, 전 기말고사와는 달리 범위도 넓고, 시험에서 허용하는 지식의 내용들이 교과서만으로는 이해하기 조금 어려운 수준이라면 어쩔 수 없이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자습서나 평가문제집이 필요해진다. 그러나, 한 달 용돈을 다 사용하여 돈이 없거나, 돈은 있는데 평가문제집을 살 돈만 있고 자습서를 살 돈이 없다면 매우 난감해진다. 두 가지를 같이 사야 심적으로 안정을 되찾게 되며, 특히 작은 사회 속에서 친구들과 시험에 관해 이야기를 할 때, 자습서를 살 돈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꼭 그 책들을 구매함으로써 자신의 여유있는 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도 생긴다. 그래야 친구들과의 이야기에 참여할 수 있으며, 자신만 모르는 이야기에 껴서 입은 열고 닫고를 반복하지도 못하고 그저 눈만 계속해서 깜빡깜빡 거릴 상황들이 발생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아마도 우리가 사회속을 살아가면서 생기는 불안함과 그래서 더 깊게 박히는 강박에 의해 재력이라는 것과 과시라는 것에 집착하게 되는 것 같다.


"돈만으로는 행복을 살 수 없다. 하지만 지하철에서 우는 것보다는 택시에서 우는 게 더 낫다."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지하철은 값이 매우 싸지만, 그 교통수단을 찾는 사람들도 값이 싼 만큼 많다. 그러나 택시는 값이 계속 불어나지만, 그만큼 택시를 찾는 사람도 적고, 무엇보다 그 택시 안에는 나 혼자 탑승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부의 장점이다. 지하철에서 우는 것은 모두가 바라보는 그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게 되므로, 자신의 감정표현의 제한을 받게 된다. 아무리 몇 천원이라는 돈을 낸다고 해도, 질 높은 편안함은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택시는 기사님과 손님 둘 밖에 없기 때문에 기사님을 제외한 나머지 중 아무도 지켜보는 사람이 없다는 점에서 자유롭게 감정을 표현할 수 있고, 그렇게 돈으로 편리함과 함께 남들에게 보여질 자신의 이미지를 오염시키지 않을 수 있다. 맨 위의 이 문장의 뜻은,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남들이 보기에 행복해 보이는 이미지는 살 수 있다는 점을 뜻하는 것 같다. 이처럼 마치 짧게 검색만 하면 몇 백 만원은 기본으로 찍히는 명품과 꽤나 고가의 자습서처럼 외적으로 보여지는 이미지를 살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되어버리면 당연히 거짓된 이미지들을 계속해서 찍게 되며, 딱 새로운 달이 시작될 때마다 기본적으로 받았던 5만원을 자신있게 말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던 나처럼 점점 자신감또한 잃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아비투스라는 것은, 고가의 돈이 드는 만큼 우리들의 존재 이유조차 값어치와 치장된 이미지로부터 정해지도록 만든다. 숫자만 기억하고 뒷 이야기는 하나도 듣지 않는 이들이 바라보는 과거의 나는, 자습서도 살 돈이 없어서 시험을 제대로 치르지 못할 학생이라는 이미지또한 아주 흐리게 겹치게 되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우리들은 어쩌면 침묵을 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등 더이상 소통이 불가한 태도들을 취하게 된다.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건,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 이라는 말을 듣게 될 저항이 아닌 그저 그렇게 알아서 흘러가게 만드는 침묵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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