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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투스라는 권력 앞에,

by 제이티

조가람


고귀한 삶을 산다는 것에서, 우리가 정해둔 고귀한 삶의 정의란 무엇인가. 애초에 고귀하다는 기준이 무엇일까. 무엇이 사람을 고귀하게 만드는가. 아마 사회가 요구하는 고귀한 삶이라고 한다면 대학이나 능력따위가 되겠지만, 나에게 있어서 고귀한 삶은 그저 때 묻지 않은 순수함으로 시작한 나의 작은 소망들이자 꿈인, 취미 생활들이다.


인간들은 누구나 삶의 시련과 고난에 맞서다가 힘이 빠지면 누구나 그 자리에 주저앉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마음 속으로 삭히고, 누군가는 노래방 마이크를 잡고 소리를 지르며, 누군가는 음악을 듣고, 누군가는 울기 바쁘다. 하지만, 삶에 지루함을 느낄때, 나는 하나씩 무언갈 하려고 했다. 그 하려고 한다의 의미는 몸을 바쁘게 하는 것. 몸을 쉴 틈도 없이 움직이며 내가 지금 힘들다는 생각을 잊도록 하려고 했다. 미련 남은 전남친 생각난다고 다짜고짜 친구한테 전화해서 질질 짜던 과거의 나를 개선하기 위해 미련 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도록 취미 생활이라는 일상의 바쁨을 이용해 오히려 그런 억지스러운 인위적인 즐거움을 느끼려고 했다.


우리는 보통,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서 형성된 개인의 취향이나 아우라 정도를 아비투스라고 칭한다. 나에게 아비투스는 개인의 습관이자, 나의 삶의 일부가 된 습관적인 취미이다. 아까 말했듯 나는 취미의 목적을 다르게 이용했다. 다른 사람들은 반복되는 챗바퀴 같은 하루하루를 견디기 위해 취미 생활이라는 간단한 즐거움을 만들며 심리적 안정을 추구하는 반면에 나는 내가 느끼는 고통이나 심리적 불안감을 지우기 위해 취미 생활을 이용했다. 점점 나의 학교, 집, 밥, 잠으로 끝나던 나의 동그란 계획표에는 점점 천문학 공부, 플루트, 피아노, 태권도, 우쿨렐레 등의 취미들이 생겨나며 점차 삶의 재능을 더불어 재미를 찾는 듯 했다. 거기에서 흥미가 떨어지는 것들은 전부 그만두고 지금까지 계속 해왔던 취미는 별로 없다. 운동이나, 음악, 과학 쪽이라고 하면 될까나? 이러한 인위적인 즐거움이 점차 순수한 즐거움이 되기 시작하자, 마음 속으로는 뜨겁지만 뿌듯함이 가득담긴 무언가가 들끓는 듯 했다. 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진짜 취미 인가 싶었다.


하지만 이러한 취미들을 나의 미래로 까지 끌고가는 사회와 어른들 때문에 점차 나는 탁해지기 시작한 걸 느꼈다. 어느 순간 엄춰서면 깨끗했던 유리구슬 같은 즐거움이 어느새 미래의 추구를 위한 자체적인 즐거움으로 변질되며 때가 타버린 듯한 뿌연 유리구슬처럼 되어있었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내가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 경쟁이라는 시스템 속 싹이 피는 열등감이라는 감정에 우리는 남들이 잘하는 것을 보면 부럽다는 감정 뒤로, 분노와 슬픔의 감정을 느낀다. 왜 그래야 하는 걸까. 우리는 잘하는 사람을 보며 배워야 하는 단계에 서있을 뿐인데.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취미이자, 조만간 나의 꿈이 될 것뿐인데. 어른들이 말하는 잔인한 사회가 이런 것이 아닐까. 처음에는 우쭈쭈 해주다가 점차 재능이라는 자본이라는 차이로 들어나는 열등감에 꿈 이라는 순수한 단어 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절대 순수해질 수 없다. 내가 사회로부터 훈계를 받고 있을때 내 친구가 칭찬을 받고 재능을 인정 받는다면 부럽다 라는 감정 뒤로 근데 왜 쟤는 아무런 소리도 안듣지, 나도 저렇게 되고 싶어, 내가 쟤 보다 더 잘할 수 있는데, 라는 세속의 목적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아비투스로 발생한 급의 차이가 점차 권력이 되면서 우리는 신분제와 같은 층이 생겨버린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점수로 매겨지는 계급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사회의 불평등으로 생겨나는 격차로 우리는 오히려 대인 관계를 형성하며 서열이 생긴다. 친구와 친구 사이에 열등감으로 피어난 급이 생기면서 의도치 않았던 대인관계의 위계가 생긴다. 또한 우리는 교양을 쌓고 기본 지식, 그리고 그 기본 지식을 바탕으로 우리가 살아갈 심화지식을 배울때도 우리는 그 만한 총량과 깊이로 사회적 자본을 형성하는 기준이 되며 큰 비용들이 발생한다. 또한 자신을 성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성찰이라는 본질적인 목적을 잊어버릴 수도 있다.


" 성공이 커질수록 행동이 자연스러워지고, 더 편안해지며, 사회적 상승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특징인 신체적 어색함이 줄어든다. 몸매, 피부, 걸음걸이, 미소, 몸짓언어와 시선에 미묘한

차이가 생긴다. 아무에게도 자신을 입증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 - 아비투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책의 구절이지만, 성공에 점차 가까워질 수록 모든게 자연스러워지는게 왜 그런지 알것 같다. 아비투스라는 권력을 가지고 이미 자신이 그 최상층에 있기에 최상층 사람들은 최상층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들과 달리, 여유롭게 삶을 살아가며 자유 라는 진정한 보편적 가치를 느낀다는 말인 것같다. 그들이 말하는 고귀한 삶과 우리가 말하는 고귀한 삶의 차이는 미묘할까? 아무리 봐도 아니다. 사회라는 공동체에서 어린아이들에게 요구받는 아비투스는 재능의 발현이였고, 청소년에게 요구되는 아비투스는 점수 증명의 가치였으며, 어른에게 요구되는 아비투스는 돈이라는 물질적 가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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