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윤
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세계시민이라 차용되는 인간들은 그저 자신의 급이나 제도를 나눈 채 그곳에 짜져있는 수자직 같은 매듭의 탐욕 사이 보이는 그 공백의 공허감에 괜한 만족감을 느끼는 조합물일 뿐이다. 이것이 어떻게 짜여져 세상이라는 직물을 이루었듯이, 실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직물이라는 이름으로 띄이는 펠트나 부직포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이것은 인간의 근성이 이러한 잘못된 매듭의 지속성을 장려한 것이며, 자신의 예전 기억을 잊으려는 사람들의 회고적인 성격의 희소성은 어쩌면 이것에 좋게 작용할 수도, 이러한 세상의 치명적인 단점이 될 수도 있다. 흔히 인간의 악용적인 특성을 생각하면 우리는 가장 먼저 "시시포스"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극명하게 알려지지 않은 인간의 사례이지만, 신화적인 성질을 지닌 그리스 신화라도 그의 업보가 명백히 드러나있었기에 지금껏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영리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이것이 정말로 실현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그의 잔인한 특성들이 이루고 이루어져 하나의 잔인한 인용물을 만들게 되었다. 모방적으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희대"라는 이름만이 기억되듯이, 시시포스도 신을 농락하였고 그들에게 장례를 치러주지 않은 아내를 모욕의 말들을 내뱉으며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려는 그 눈 뜨고 못 봐줄 행동들이 오로지 자신의 장기와 그 하얀색 머리카락과 아내와의 맞잡은 손, 부질없는 주름들을 만들기 위해 입에서 나온 말들의 음절들이 모여 만든 신의 벌이 결국 "바위"라는 존재의 무거운 돌덩이로 치부되었을 때, 힘을 들여 이것을 올리고 다시 그것이 날카롭고도 위태로운 작용점에서 추락하였을 때 영원한 들어올림이 성사되는 것에 대해 시시포스는 자신의 대한 죄를 씻어낸 듯 땀을 흘리며 계속 올리고 올렸다. 작용점이 닳아 어쩌면 그것이 세워질까 하는 유연하고 연역적인 희망을 품고 다시 한 번더 올려보는 그 희망이 지금의 영원한 고통이 되어 지난날의 인간세계에서의 "나"를 돌아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에 들어선 부패한 정치와 나라경제의 걱정을 하는 부산 국회의원 홍순헌님의 "나라 경제가 걱정입니다"라는 그 하나의 궁서체적 문구를 보아도 알 수 있다. 현대에도 다른 사람들의 투표권이라는 이름의 호의를 권리로 받아들여 이러한 정책과 비리들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어쩌면 "시시포스의 비리"들 보다도 더 심한 정책들을 갈구하며 우리들의 고통과 비난을 한 몸에 사게 한다. 이것이 바로 왕이 잘못 판단된 참작된 사회이자, 민주주의의 필요성이 느껴지는 홍순헌 씨의 증언이기도 하다.
우리가 의원내각제와 대통령제의 태동을 혼합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 것이다. 거짓과 탐욕의 세상에서 우리는 이것들을 통해 급과 제도를 나누고 있다. 서양과 동양으로, 남한과 북한으로, 여러 개의 유닛으로 나누어지는 우리들은 어쩌면 이러한 다양한 계급을 만들려는 상상력의 무한함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물품이 될 수 있지만, 이것조차 어쩌면 사람들의 문화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자, 대표적인 사례로는 1950년대 말에 미국의 정신 분석학자 에릭 번을 예로 교류 분석이라는 연구를 진행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개인적인 관계에서는 본능적 역할 분담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한 마디로 서양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시시포스라는 이름의 왕과 그의 이름 모를 신하라는 군신관계는 이름 모를 신하는 그저 시시포스를 사장에 지나치지 않은 존재로 보기 때문에 언제나 하인은 왕의 권한에 상관없이 자신의 의사결정에 따라 반항적인 태도를 보여 갈아탈 수도, 끝까지 모실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태초적인 역할이 정해진 동양과는 다르게 서양은 이것을 바꿀 수 있다는 혁명정신이 존재하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동양은 역할이 정해지면, 박해자, 피해자, 구원자라는 세 개의 범주로 나누어서 역사를 전개해간다. 박해자와 같은 경우에는 권문세족들을 예로 들수 있다. 권문세족들은 이러한 자신의 탐욕과 욕망을 위해 어떠한 짓도 서슴치 않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말 한마디에 왕이 그렇게 백성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반역죄나 역모로 처리하여 죽이는 것도 그들이 전부 다 박해자였다는 것에 대해 시상이 전개된다. 앞서 말했듯이 피해자는 전적으로 백성들에게 피해가 간다. 그들은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을 뿐인데, 찾아오는 권문세족들의 탄압과 강제적 세금 징책들이 한시바삐 그들을 따라다니며 그들을 옥죄어 온다. 이러한 점들에 대해서 역사에서 가장 피해를 많이 받은 사람이 백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마지막으로 구원자로는 신돈이 있다. 공민왕의 시절 그는 비상한 능력을 통해서 나라의 살림들을 바로잡았고, 풍자적이면서도 그 풍자적인 요소 자체를 풍자하는 능력을 선보여 사람들에게 이유 모를 자신의 세력화를 부추길 만한 행동을 강행하기도 하였다. 그에게 공민왕의 시절은 사람들이 풍요롭고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마치 하나의 인간 신문고가 된 듯 사람들에게 왕과 비슷한 역할을 해 주었고, 그는 공민왕 시대에 구원자로 꼽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 세개의 역할을 제외한 "왕"은 도대체 모든 자격과 권리가 있는 것인가? 나는 그를 중립자라고 정의하기로 하였다. 그는 하늘과 천하의 권리를 원초적으로 받아 시행하고 모든 그의 말들과 간청이, 어쩌면 신하들에게 내려지는 숙청의 표시가 그들을 얼마나 강하게 통치할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이것이 그가 중립자라는 역할을 가지고 그 안에서 어떠한 살생과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다소 불공평한 권한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중립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신하들이 일으킨 행보와 업적들이 많았기에 난 이러한 세상의 흥망 여부가 과연 신하들에게 있을 것이라 주장해본다.
이것들이 모든 사람들의 잣대를 평가하는 저울질은 아니다. 사람들의 흥망 여부는 현대에 와서 권위자들의 잔혹한 비리들을 주제로 발단이 시작되었으며, 이것이 어쩌면 사람들의 시선에 변화를 주었을 것이라는 명분이 존재한다. 밀과 쌀이라는 존재 하나만으로 사람들의 식생활과 문명의 위상까지 정해질 정도라면, 인간이 얼마나 이러한 환경적 특성에 영향을 많이 받는지를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비리들에 맞서 싸우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정의로운 특성들이 어쩌면 사람들의 개인적인 특성의 강화를 촉진할 수 있지만, 열혈한 사람들의 의지들이 공동체의 균열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렇기에 난 끝이 없는 어둠보다는 물러서기를 택하기로 하였다. 타오르는 불꽃이 결국은 비가 되어 세상에 가뭄과 홍수의 역작용을 일으키는 것 처럼, 가끔은 불의를 참지 못하는 이러한 어두움의 무뎌짐이 사람들에게 더욱 균열의 반감을 일으킬 수 있다. 시시포스도 왕이라는 권위적인 존재로써 자신에게 주어지는 왕관의 무게를 잘 악용하였다는 좋지도 나쁘다고도 말하지 못할 생애를 살아왔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사제"가 되어야 한다. 신화에서만 나오는 사제를 어떻게 하겠냐 물어볼 수 있지만, 그 만큼 다른 사람들의 소식을 전하라는 말이다. 이러한 인간 세상의 투영과 통찰은 언젠가 자신의 감정들을 희소시킬 수 있는 일련의 정화 과정이 되며, 인간 세상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네티즌"이라는 존재는 사제라는 순수한 정화자의 모습에서 약간 뒤틀린 시각으로 활용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흔히 순결함을 상징하는 사제는 이제 우리가 실천할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좋지도 않은, 나쁘지도 않은, 그마저도 엄청난 비리가 가득한 사람들은 이미 시시포스를 몇 백명이나 복제해놓은 정도로 사람들의 욕심의 그릇에 대한 갈망이 심해졌다. 이것이 심해지면 이미 균등하지 않은 사회의 지위를 한탄하며 걸리는 우울증의 종류가 많아지고, 사람들의 가용 가치를 잃게 되는 고장난 마음이 결국 삶을 바닷물로 인도하게 될 수 있다. 이것을 지켜볼 수 없다면, 멈추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에게 순결한 진실을 전하는 열혈한 사제가 되면 어떨까. 왕에게 주어진 왕관의 무게는 무겁고, 신하에게 주어진 완전한 대안의 유식한 머리도 여전히 무거웠으며, 평민에게 주어진 무지함조차 가벼운 무게를 자랑하지는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