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생각과 느낌이 다르듯

<동물농장 문제>

by 제이티



백지원



민주주의의 특징은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점에서 시작한다. 누구 한명이 모든 의견을 총합하여 대략적으로만 세상으로 언급하는 것이 아닌, 모든 국민들이 약간의 차이를 둔 각기다른 의견들을 세상에 대고 말하며, 모두의 말 속에 담긴 진정한 진심과 주장을 정확하게 전달한다. 이렇게 우리들이 표현의 자유와 말할 권리를 요구하는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발견할 수 있다.


흔히 사람들과 대화를 하거나, 대표적으로는 남의 이야기에 관련된 내용을 서로 주고 받을 때, 말이 변질된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이 처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걸 전해들은 어떤 사람은 그 전체적인 내용들 가운데 빠진 내용이나 부실한 내용들에 대한 추측을 전하고, 그 추측을 들은 어떤 이는 그것이 진실이라 믿게 된다. 이렇듯 우리들이 직접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전해진 그 이야기들은 언제나 변질될 가능성이 있으며, 그렇게 처음 얘기를 전한 사람의 바람이던 이야기의 본질을 잃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표현의 자유를 주장한다는 점도 있다.


또한 우리들은 남이 가진 표현의 자유 또한 지지해주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민주주의의 특징은 모든 이들이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말했다. 이처럼 만약 어떤 한 사람들이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이나, 나의 주장과 반대되거나 혹은 약간 다른 점을 지닌 면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들은 그 사람들의 주장과 자유를 적극 지지해주어야 한다.

”나는 당신의 말을 싫어한다. 그러나 당신이 그 말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나는 죽도록 요구할 것이다.” 이 말은 볼테르의 주장으로,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자유는 오직 나를 위한 자유가 아닌, 모든 이들의 의견과 권리를 인정해주고 존중해주는 민주주의 답게 남을 위한 자유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자유라는 것은, 이처럼 가끔은 우리들에게조차 불편함을 주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가지면 좋지만, 남이 가지면 인상을 찌푸리고 바라볼 때도 있는, 이 내로남불의 정석과 같은 상황들을 만드는 표현의 자유는, 자신과 같은 권리를 가진 국민들을 이해하는 능력은 기를 수 있으나, 여전히 그에 대한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점이 된다.


책 동물농장에서는 평생 주인에게 부림이나 당하던 노예와 같은 지위를 가진 동물들이 말을 하고 생각을 함으로써, 주인이라는 왕이자 높은 계급층에게 자유를 행사할 권리를 얻어낸다. 그렇게 서로 풍차를 건설할 생각까지 하게 되며, 그 사건 속에서 서로 동물들은 여러 갈등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책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동물들이 전부 자유를 얻었으나, 결국 그 무리는 전부 공통적인 자유의 권리를 얻게 되면서 서로의 권리를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듯한 이기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속을 정리시키고자 하는 몇몇의 동물들이 나와서 이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으니 자신이 지휘자와 같은 역할이 되겠다고 말하며 결국 왕과 비슷한 큰 권력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남들보다 더 많은 자유와 권력의 힘을 얻은 소수의 동물은 일을 덜 하거나, 혹은 남들을 오히려 부당하게 부려먹는 등의 행동들을 보여주며 자신의 권위와 권리를 역이용했다. 그렇게 생긴 동물들이 지켜야 하는 규칙인 칠계명의 내용이 바로 “모든 동물들은 평등하다. 하지만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욱 평등하다.” 이다. 사실 자유를 얻고 난 후 바로 생겨났던 칠계명은 뒤의 내용을 뺀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였다. 그러나 동물들은 계속해서 인간들이 가졌던 자유와 어두운 악들을 통해 얻었던 행복들을 경험하면서 그 외의 규칙들을 거의 티가 나지 않게 수정했고, 그렇게 높은 권력을 맛 본 동물들의 쾌락 또한 그 규칙의 수정에 반영되었다. 이 책에서 알 수 있는 점은, 처음에는 차별받던 모두가 평등한 권리를 갖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또 그 내부에서는 다시 차별과 불공정성 등이 발생하게 된다는 점이다.


영국에서는 예민한 소재와 주제를 다루는 언론이나 뉴스를 배제시킨다. 기자들이 말할 권리와, 잘못된 높은 지위층의 의견에 대해 반박할 권리를 잃게 만드는 이 정책은, 아무래도 자신의 자유를 주장하는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이 점이 매우 불평등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만약 우리나라와 같이 각각의 개인들의 의견들이 전부 활발하고 자유롭게 일어난다면 과연 좋은 점만 생길까? 대한민국의 뉴스만 보아도 어떨 때 보면 잘못된 내용들을 야기시키는 점도 가지고 있으며, 높은 사람들을 조롱거리 삼아 다수의 시민들의 관심과 호응을 받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아무리 왕의 권력이 약화되고 다수의 국민들과 빈약한 사람들이 강한 힘을 얻게 된다고 하더라도 상황은 꼭 좋은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느 날 아마 열 살쯤 된 것 같은 사내아이가 좁은 길에서 커다란 말이 끄는 짐마차를 몰면서 말이 방향을 바꾸려고 할 때마다 채찍을 휘두르는 것을 보았다. 그때 문득 만약 저런 동물들이 제게 힘이 있음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녀석들에게 아무런 힘을 행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인간이 동물을 착취하는 방식과 부자가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하는 방식이 아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문장은 조지 오웰의 책 동물농장의 서문에서 나온 내용이다. 프롤레타리아는 병력의 의무도 없고, 정치에 관해서는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는 노예계층의 사람들로, 자식밖에 남길 수 없는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계급이다. 부자들이 이런 사람들을 이용하고 사용하는 과정과 방법이, 마치 덩치도 작고 힘도 없지만 목소리만 큰 어린 아이가 말에게 채찍을 휘두르며 권력을 행사하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조지 오웰은 말한다. 분명 왕의 계층의 사람들은 머리가 투철하게 뛰어난 것도 아니고, 현실성있는 논리들을 펼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늘 복종한다는 점을 설명한다.

조지 오웰의 문장을 해석하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는 과거의, 혹은 언론의 자유를 억압당하는 영국의 시선과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 두번째로는 현재의, 혹은 대한민국의 몇 초만 동그란 로딩을 기다리면 계속해서 상류층 관련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 만약 전자의 경우로 바라본다면, 조지오웰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약자들의 입장인 시민들에게로부터 자신의 잠재력을 깨달았으면 하는 마음이 긍정적이게 사용될 수 있을 것이고, 동물농장과 같이 큰 권력남용의 피해가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치 책 동물농장에서 나온 초기의 동물들의 태도들처럼 협력적인 태도와 민주주의적 면모를 띨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처럼 조롱이라는 점이 가장 자유롭게 쓰이고, 대통령에 관련된 캐리커쳐를 그려서 세상을 풍자시키는 등, 여러 자유들이 허락된 이 사회에서 바라보면, 오히려 좋지 않은 상황을 불러올 수도 있다. 별 의미도 없는 남의 발언 마저 자신의 자유 주장을 위해 호응해주어야 하는 우리들의 입장에게 왕들의 눈치에 대해 대응할 권력과 힘을 내면에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면, 우리들은 당연히 지금 가지고 있는 자유의 권리보다 더 큰 힘을 바랄 것이고, 도전할 것이다. 그럼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 문제점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밑의 문장이다.

“표현의 자유는 종종 사회적 불만과 절망을 표출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예컨대, “대한민국은 헬조선이다”라는 표현은 개인의 절망과 불만을 드러내는 사례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이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대중적으로 확산되면, 체제에 대한 근거 없는 냉소와 불신이 사회 전반에 퍼질 수 있다. 이는 건강한 비판과 문제 해결을 위한 논의 대신, 무력감과 체제 부정이라는 파괴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건설적인 비판과 달리, 냉소적인 표현이 주는 문제는 민주주의의 핵심인 공공 신뢰를 약화시키는 데 있다.”


우리들은 그렇기에 민주주의 개념을 지키기 위해선 자유의 억압에서 완전히 벗어나서는 안 된다. 마치 우리들에게 군것질을 하지 말라고 입에 김에 싼 밥을 넣어주는 엄마처럼, 군것질이라는 일종의 자신의 몸에 해를 끼치는 자유의 행위를 강압하면서 대신에 김에 싼 밥이라는 영양가 있는 음식을 넣어주는 그런 사회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들은 자유를 주장하기에 엄마의 말을 전부 반대하지만, 결국 엄마의 큰 소리로 자유를 억압당하여 먹은 그 김밥은 든든하고, 맛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끔은 억압당하는 느낌과 상황을 거부하는 행동 또한 아예 복종하는 행동과 마찬가지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하고, 즉각실행하는 태도를 고치고자 해야한다. 언론중재법과 같이 욕설과 혹은 비난, 조롱과 같은 언론의 자유는 억압하지만, 그보다 훨씬 좋은 ’푸바오가 태어났다‘ 와 같은 행복한 이야기들을 기사에 언급하게 하면서 사람들을 한 층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진정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 싶다. 과도한 자유의 해방은 우리들에게 비웃음을 행복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지만, 적당한 자유의 억압은 풋웃음으로 하루를 행복하게 만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손에 움켜진 왕국의 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