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영
우리 사회에 영웅은 언제나 필요하다. 설령 그 영웅이 가짜더라도 모두가 존경하고 모두가 그 사람을 본받을 준비가 되어있다면, 그 자체로 영웅은 우리 사회에 쓸모가 많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생물은 자신이 정점에 서서 누군가를 리드하고, 대중을 규합시키기보다는 그 규합된 대중에 속해서 남들과 함께 외부에 적에게 아우성치기를 좋아하는 생물인지도 모르겠다. 칠레 현대사에서는 큰 논란이 되는 인물이 존재한다. 바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다. 피노체트는 1973년, 미국 헨리 키신저와 CIA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다. 대통령궁을 전폭기로 폭격하고 기갑부대와 보병을 동원해 정권을 장악한 그는, 폭정을 펼쳤다. 쿠데타가 성공하고 3개월동안, 그는 자신에 반대하는 세력을 산티아고 월드컵 경기장에 감금하고 고문했다. 또한 그 기간 정치범 97명을 헬리콥터에서 처형한 ‘죽음의 캐러밴’ 사건을 일으켰다. 또한 집권기간 내내 정치범 수용소를 운영했고, 잔혹한 고문을 가했다. 주기적으로 정치범들을 헬리콥터에 태워 바다에 던졌다. 그전부터 경찰이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군대가 경찰의 역할을 수행하는 군국주의 기조가 강했던 칠레는 그의 집권 이후로 이러한 군사주의적 성향이 더욱 강해지게 된다. 그는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폭압적인 폭군들 중 하나였고, 옆나라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호르헤 비델라보다 더욱 폭압적인 정치를 했다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이웃나라의 폭군 호르헤 비델라보다 더 많은 업적을 남겼다. 우선 칠레의 내부를 안정시켰다. 피노체트는 집권 초기부터 집권 말기까지 극도로 폭력적인 반대파 탄압, 반체제 세력 탄압을 자행했다. 군대에게 경찰의 임무를 동시수행하도록 하는 ‘계엄령’을 칠레 전체에 선포했고, 실제로 이 명령은 유효하게 진행되어 이 기간동안 많은 반군이 제거되었다. 그런데 반군의 주 수입원은 마약 공급인 경우가 많았다. 반군이 위치해있는 산악 지대에서 무기를 살 돈을 마련하고 지속적으로 충당되어야 하는 전투원들에 대한 보급품 역시 반군은 사비로 구매해야 하는 처지다. 그래서 남아메리카의 반군들은 지역 카르텔과 손을 잡았다. 그 결과 반군의 무력과 카르텔 갱단의 자체 무력이 더해져, 지방 지대는 마약의 온상이 되었고 아직도 남미 지역에서는 그런 사례가 빈번하다. 하지만 첼시에서는 피노체트 정권이 반체제 게릴라 소탕을 위해 온 나라를 들쑤셨고, 전폭기로 지역을 폭격하는 명령까지 내려가면서 이러한 반군-카르텔 연합세력을 박멸했다. 그 결과 현재 칠레는 마약 카르텔과 지역 반군 세력 없이 안정적인 경제를 이뤄낼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해, 경제를 민영화해 후일 칠레가 광업국가, 농업국가로 변모해 안정적 수입원을 찾는데에도 기여했다. 소외된 남극권 지역을 위해 고속도로를 만들었고, 이는 중요한 인프라가 되었다. 그는 전형적인 ‘개발독재자’의 면모를 보였으며, 폭압적 통치와 비교되게 경제성장면에서 피노체트의 업적은 대단했다.
아직도 칠레에서 피노체트란 사람은 평가가 첨예하게 갈리고 있다. 그가 91세의 나이로 사망한 2006년, 어떤 사람들은 파티를 열기도 했지만 일부는 눈물을 흘리며 조기를 걸고 애도하기도 했다. 만약에 피노체트의 시대를 겪거나, 그에 대해서 역사책으로 배운 사람들이 모두 죽고난 뒤, 오직 개인적 감정 없이 그의 공과 과만 남는다면, 세상은 그를 폭군으로 평가할까? 영웅으로 평가할까? 사람들이 평가하기에는 영웅이 맞을 것이다. 우리는 결과론적인 평가를 좋아하니 말이다. 칠레에서 아마 그는 영웅으로 평가받을 것이다. 경제의 초석을 다졌으며 후일 더 급속화된 경제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산지의 반군 연계형 게릴라를 모조리 소탕했으니 말이다. 우리 사회는 한 영웅이 될 자질이 있는 개인을 논할 때, 그에 대해 객관적 평가를 내릴 수 있을 만큼 시간이 흐르면 영웅으로 기억한다. 무조건. 그 영웅이 진짜 영웅이든 아니면 영웅으로 포장된 폭군이던, 그건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사회 전체를 리드 해 줄 수 있는 폭군을 사회 전체에 내분을 일으키고, 논란거리가 충분한 성군보다 좋아하니 말이다.
프랭크 허버트의 소설, ‘듄’은 이러한 영웅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베네 게세리트는 수천년 간 아라키스의 프레멘들에게 예지자가 올 것이라는 미신과 예언을 퍼뜨렸다. 그래서 폴이 하는 모든 행동은 프레멘들에게는 예지자의 행동이다. 이렇게 원치 않았을지라도, 만들어진 영웅이 진정한 영웅으로서 각성하기 위해서는 시련과 고난을 겪어야 한다. 폴은 프레멘 부족에게 진정한 예지자로 인정받기 위해, 생명의 물을 마시며 죽음을 극복하고, 모래벌레를 타면서 프레멘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다. 그렇게 해서 폴은 게릴라 전술로 하코펜을 괴롭히고, 핵무기로 아라키스를 공격하겠다는 협박으로 결투를 해, 황제에 등극한다. 결국 만들어진 영웅이었던 폴은, 진짜 영웅에 등극했다. 만들어진 영웅은 진짜 영웅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진짜 영웅이 되었다. 하지만 만들어진 영웅 이야기는 비극이었다. 폴이 원했던 것은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지키기 위해 그것을 무너뜨리려는 이들과 싸우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전 우주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에 폴은 무기력을 느낀다. ‘종교’ 와 같은 ‘믿음’, 자신이 옳다고 믿는 ‘믿음’ 은 때로 대중이라는 연료를 얻어 활활 타오르게 된다. 결국 집단적인 광기로 흘러간다. 신의 이름으로, 정의의 이름으로, 애국의 이름으로, 반대 세력에 대해 극단적인 비난과 공격을 가하게 된다.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그러했고, 십자군 전쟁과 같은 종교 전쟁과 현실에서 벌어지는 인터넷에서의 마녀사냥이 그 예시다. 결국 폴이라는 만들어진 영웅은 영웅의 존재와, 우리 사회에 영웅 존재 유무에 대한 논쟁거리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정의롭고 고결한 영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지도자란 개인적 욕망이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상적인 영웅이란 자신의 이익을 초월해 모두의 이익을 실현하는존재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영웅적 행위는 개인의 도덕적 성장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정의와 질서를 강화하는 데 필수적이다. 영웅의 존재가 그 영웅 개인에게 어떤 부정적인 일을 가져오고, 영웅이라는 존재가 세계 전체에 어떤 영향을 가져오든 모든 사회의 궁극적 목표인 ‘사회질서 유지’에는 영웅은 꼭 필요하다. 소설 ‘죄와 벌’ 속 로자가 반사회성 행동을 하는 것도 영웅의 부재에 있다. 모든 사람 마음 속에는 영웅이 한 명 쯤 있다. 그 사람을 믿고 따라가면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는 것이다. 하지만 로자의 공허하고 빈 검은 눈동자에 영웅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그 겨로가 그는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자신의 처지를 과대평가한 고통을 뼈저리게 느꼈다. 사회 전체에는 사회구성원이 없어졌고, 무고한 피해자들이 사라지고 모방 범죄 역시 일어날 가능성이 있으니 피해고, 로자 개인에게 있어서도 비극이었다. 이처럼 영웅이라는 존재는 단순히 그 긍정성과 부정성이 얼마나 되든, 우리 사회에 큰 도움이 된다. 영웅이란 영웅적 행위를 한 개인이고, 그 행위로 추앙받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에게 있어서는 맨토이며, 하나의 ‘메시아’ 라는 것이다.
결국 피노체트와 같은 폭군은, ‘안티 히어로’ 였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업적만을 놓고보면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사회민주주의적 정책을 펼친 전임자 살바토르 아옌데보다도 더 위대한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엄청난 폭정을 펼쳤고 그의 폭정과 살해한 정적, 반민주 행위는 어느 독재자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렇기에 그는 칠레 사회뿐만 아니라 정치학적 관점에서도 큰 논쟁거리다. 하지만 정의를 무시하고, 오직 수치로만 보았을 때 그는 사회의 영웅으로 남는 것이 맞다. 만약에 그가 지금처럼 계속해서 역사적 논쟁이되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바뀌면 사회적 문제가 될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대 갈등의 원인 역시 이러한 과거사에 관한 문제가 많은 것처럼, 한 인물에 대한 정의가 제대로 내려지지 않을 경우 일어나는 사회문제는 영웅으로 정의되었을 때 일어나는 사회문제보다 많다. 문형식 판사의 책 <최소한의 선의>에서도 볼 수 있듯이, 우리 사회는 궁극적으로 사회시스템 및 문명 유지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럴때는, 폴이라는 이중적 인물과 피노체트라는 폭군과 성군 두 면모 모두 가지고 있는 인물들 역시 모두 영웅이 되는 것이 맞다. 설령 그들이 안티히어로여도 말이다. 우리가 베트맨을 히어로로 기억할까? 아니면 악당으로 기억할까? 당연히 히어로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런 히어로 역시 조커를 잡는다는 명분 하에 불필요한 폭력을 자행했다. 반국가세력을 소탕한다는 명목 하에 폭력을 자행했지만 폭군으로 기억되거나 영웅으로 기억되는 박정희 대통령이나 피노체트와 다를것이 무엇인가? 결국 우리 사회에는 영웅이 필요하다. 안티히어로 역시 히어로다. 그 영웅이 ‘안티 히어로’와 같은 과업을 얼마나 저질렀든, 그는 영웅이고 우리 사회에는 영웅이 필요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