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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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창을 누르자마자 보이는 여러 댓글들, 가장 먼저 보이는 상단의 댓글들은 가장 많은 좋아요를 가지고 있으며 가장 많은 답글 또한 포함하고 있다. 유명한 댓글의 접혀진 답글 쪽지를 열어보면 모두 작성자의 댓글에 옹호하고 지지하는 분위기, 답글들 사이 조금이라도 댓글에 대해 비판하거나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보이면 다른 답글들은 그 답글을 짓밟아 뭉개기 바쁘다. 어느새 나도 화면을 아래로 넘겨가면서, 상단의 댓글들 몇 개만 보고 있으면, 나의 생각보다는 그들의 생각에 흠뻑 젖어드는 느낌이 들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 마치 댓글에 답글을 다는 작성자들처럼, 댓글을 따르는 추종자들과 같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가끔씩 인지하곤 한다. 심리학자 카를 융은, 이를 집단 ‘무의식’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존재할 수 없으며, 저항할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아무 종교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시험을 보기 전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하고, 생일날 케이크의 촛불을 불 때마다 소원과 희망을 비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믿으면서도 남들이 다 하기 때문에 나도 무의식적으로 종교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 <듄 파트2>에서는 공작의 아들이었던 폴이 그의 가문 아트레이디스가 몰락한 후, 프레멘들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하고 프레멘들에게 구원자와 다름 없는 ‘리산 알 가임’의 역할을 맡게 되며 모든 주민들이 그의 이름을 외치는 등 그는 점점 신격화된 존재가 되어 간다. 베네 게세레트이자 폴의 어머니 제시카는 마치 신화처럼 그의 이야기를 널리 퍼뜨리고, 그의 존재를 계획해가는 개종자의 역할을 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프레멘의 족장인 스틸가조차 폴에게 엄청난 의지와 기대를 안고 그를 열렬히 지지하며, 챠니를 제외한 모든 주민들은 그를 신으로 여긴다. 이 또한 집단 무의식과 같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챠니는 계속해서 이러한 종교가 자신들을 노예로 만들고 있다며 호소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믿어주지 않으며 그녀는 그저 조롱당할 뿐이다.
이러한 집단 무의식은 우리 사회를 둘러보면 쉽게 발견할 수 있으며 이는 정말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존재할 수 있는지의 의구심을 유발한다. 강한 중력이 나의 눈꺼풀을 짓누를때마다 눈을 비비며 다시 일어나야 하는 이유, 외울 것도 많고 풀어야 할 문제도 많은 오늘의 숙제를 보며 한숨이 나와도 꾸역꾸역 해내어야 하는 이유, 좋은 대학을 가서 성공하기 위해서다. 나는 어느샌가 좋은 대학을 가야 성공한다는 사회의 공식에 세뇌되어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카를 융은 내가 집단 무의식에 속해있으며 나를 자유의지조차 없는 약한 인간이라고 표현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가끔씩 느끼는 바가 있다. 왜 꼭 대학을 가야하는 것이 성공한 삶일까, 성공한다는 것이 좋은 학벌에 인정받으며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것? 그 결과 나는 행복할까?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성공한 삶이라는 문장을 사회의 공식이라고 표현한 나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이러한 생각을 한번 쯤은 해보았을 것이다. 더 나아가, 대학을 들어가는 목표가 아닌, 정말 내가 행복할 길을 찾아 불안정하지만 용감한 모험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이러한 면에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빼빼 마른 사람, 덩치가 좋고 힘이 센 사람,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중간 체형의 사람까지. 나는 자유의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비슷해 보이지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완벽하게 다른 하나하나의 인격체인 것처럼, 저 멀리서 보면 인간들은 마치 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회에는 자유의지가 강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약한 사람도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이를 더 자세히 확대해보면 그 거대한 경로를 이탈하는 사람들, 나에게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일까 고민하는 사람들, 언젠가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모험을 하겠노라 결심하는 사람들, 사회의 공식을 알고 있지만 안정적인 그의 가정을 위해 정확히 경로를 따라다는 사람들처럼 모두들 자신만의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하고, 사고한다. 따라서, 어쩌면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표면적인 사람들의 행동과 결과만을 보며 판단한 카를 융의 주장이 모순이 아닐까 싶다.
수박의 표면은 모두 비슷하게 생겼지만 수박의 껍질을 벗겨보기 전에는 수박의 속이 설익었는지, 잘 익었는지, 혹은 썩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인간들이 큰 범주 내에서 비슷한 길을 향하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외부로만 나타나는 행동이나 표현만으로는 그 사람이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욕망을 품고 있는지 어느 정도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알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지 못하며 저항할 수도 없다는 카를 융의 주장과 달리, 나는 겉으로 표현되는 행동과는 별개로 인간은 정도가 모두 다른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