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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의 평화

by 제이티

조가람




메시아, 이는 외계에서 온 목소리 라는 뜻으로 구원자, 영웅이라고 정의하면 쉽게 이해가 가능하다. 더욱 더 쉽게 라면 겨울왕국의 엘사, 모아나의 모아나 등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메시아는 인간의 갈망과 인간의 정의감, 인간의 욕망이 담겨진 선의의 가면을 쓴 인물로 우리는 이 영웅을 따르고, 영웅을 향해 고개를 조아린다. 하지만, 우리는 긴박한 상황, 피폐해져가는 사회 속,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평화를 가져다줄 메시아를 얼마나 기다릴 수 있을까? 영웅을 기다리는 것은 희망고문에 불과하다. 영웅은 허상이며, 영웅이 되려면 집에 살고 있는 토끼같은 자식과 하나뿐인 배우자, 지금 나의 사업과 재산, 신분을 포기해야한다는 것을 아니까 말이다.



영웅이란, 자신의 한계를 극복 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 라고 정의되기도 한다. 영웅은 우리에게 잠재력과 신의 힘, 본 받고 싶은 용기와 희생정신을 보여주며 단순한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아닌, 기존의 사회 가치 체계를 넘어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역할을 한다. 정의로운 모습을 보여주며 사람들의 평화를 책임지는 이 영웅은 그들이 보여주는 것만큼 과연 완벽할까? 영웅은 비로소 초인의 능력을 타고난 이들이지만, 그들도 인간이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들은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며 악당을 물리치며 선의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악당을 물리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권력을 잡으며 독점을 하고 오히려 세상을 어지럽힌다. 영웅도 인간인지라, 그들도 황제의 자리를 원하기에 독점을 바란다. 자신의 악당을 잡았다 라는 선의의 역할이 도출해낸 결과만으로. 그들이 잡은 권력을 악용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진정한 흑막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 단 한사람 > 이라는 책 속 목화는 수많은 죽음 속에서 단 한사람만을 살릴 수 있다. 목화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 중 할머니는 이를 기적이라고 여겼지만, 장미수는 목화를 악마라고 칭한다. 목화가 살려낸 이에게 목화는 그에게 영웅이 될 수는 있지만, 목화가 살려내지 못하는 무수히 많은 다른 이들은 목화를 증오하고 목화를 향한 원망을 토해낼 것이다. 이것이 영웅의 불안정한 모습이다. 영웅은 모두를 살려내야한다는 압박감과 동시에 의무를 가지고 있다. 영웅이 구해내지 못한 사상자가 발생한다면 영웅은 그때부터 마녀사냥이 시작된다. 모두를 구해낸 영웅만이 진정한 영웅이 되고, 그런 자격을 가진 영웅이 악당을 마녀사냥 할 수 있다. 영웅은 자신이 영웅이 되기 위해, 자신이 메시아가 되기 위해 위험천만한 길도 아닌, 목숨을 걸고서 걸어야하는 외줄타기에 위태롭게 서있는 존재이다. 그가 사람들의 고개 조아림을 받기 위해서는 손에 얹어있는 모든 생명을 떨어트리지 않고 최대한 빨리 이 외줄타기를 끝내야한다. 그 곳에서 살릴 수 있는 생명이 하나 라는 제한이 있는 목화는 과연 영웅이 될 수 있을까? 구원자일 수는 있겠지만 목화의 모든 선택은 결국 마녀사냥의 표적이 된다. 영웅도 그렇다. 영웅이 하는 말은 모두 정의롭고 신성한 것이다 라 하지만, 가끔씩 누군가 손을 들고 말한다. 너 정말 할 수 있어? 못해낼꺼면 어쩔건데? 라고. 우리는 영웅에게 자꾸만 시나리오를 건넨다. 타노스가 도시를 전멸해버릴 순간, 모두를 살려내고 해피엔딩을 맞이하라는 시나리오. 목화 같은 선택이 불안정한 영웅은 그저 관객들에게 비극의 영웅으로 남을 뿐이다.



그치만, 영웅의 정의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내는 존재인데 성공하지 않을까? 모두다 살릴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그러한 보장도 없고, 계속 되는 시민들의 기대와 다음 시리즈는? 라는 강압에 영웅은 계속해서 살리고 살아야만 하고 악당을 찾아야만 하고, 그 악당을 물리쳐야한다. 영웅은 멋있게 악당을 떼려눕혀야 한다.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폭력과 폭행은? 십자군 전쟁도 성지를 탈환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한 전쟁이지만, 가면 갈수록 성스러운 목적이라는 본질적은 목적은 잊어버린채 그저 산업의 목적,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공격 등의 영웅과 전쟁은 폭력과 권력, 독점과 힘의 본질 그 자체에 충돌하게 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영웅은 선의롭다는 이유로 그 무게가 정당화되고, 전쟁은 이기는 자가 권력을 가진다는 사실만으로 사람이 죽고 죽이는 행위가 그저 당연하다듯이 실행된다. 그렇다면 영웅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쯤대면 우리는 평화를 가져오는 것은 영웅이 아니라, 그저 고요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웅이 그런거라면 개나 소나 다 영웅하겠다 라는 것도 어쩌면 맞는 말이다. 우리도 내가 할 수 있어요! 라고 무심코 던진 말이 진짜 되면 자신도 모르게 얼떨결에 영웅이 되니까 말이다.



영웅이라는 자에게는 확실하고 뚜렷한 그의 목적, 자아가 존재하기에 영웅이라는 신분을 가질 수 있지만, 우리는 자아가 없기에 그저 영웅만을 애타게 찾고 영웅이 되기 위해 무책임한 선택을 저질르고, 영웅에게 고개를 조아린다. 우리는 이제 영웅이라는 허상을 향한 숭배를 멈춰야한다. 우리는 각자의 관점에서, 사회가 망가져가는 상황에서 강력한 리더, 영웅이 아닌, 각자의 방식에서 서로가 서로의 자아를 찾고 그 문제를 모두가 협력해서 해나가야 한다. 아무리 힘이 없어도 불을 이겨내는 소방관이라는 영웅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정의감 가득찬 시민의 안전과 사회의 평화를 책임지는 경찰이라는 영웅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영웅이 될 수는 없지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 인생 속에 구원자로는 남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 만의 빛깔을 찾아, 손길을 받는 것이 아닌, 때로는 손길을 내밀고, 때로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이 굴레에서 빠져나와야한다. 영웅이 등장하는 순간 그저 우리는 들러리이기에, 영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기에, 완벽한 행복을 맞볼 수 없는 것처럼, 완벽한 이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그저, 불안정한 존재임을 받아드리고 힘이 평화를 불러온다라는 고정관념은 버려야한다. 그저 주먹부터 날라가는 평화의 싸움은 피만을 남기고, 광기만을 남기고,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을 낳기에 우리는 가끔 고요해질 줄 알아야한다. 그 순간의 작은 고요가 평화를 불러온다.



슈퍼맨처럼 날아다니며 악당을 멋있게 잡아내는 것만이 영웅은 아니다. 우리 모두가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도 우리는 영웅이라는 또 다른 의미의 독재자가 되서는 안된다. 평화가 필요하다면 고요를 불러보자. 비명소리와, 피 튀기는 소리가 아닌, 그저 잠깐의 조용. 언론의 고요와 인터넷 속 사람들의 좋아요 많은 글들이 널리 퍼지는 것이 아닌, 그 선에서 끝난다면 우리는 하나 인지하게 될 것이다. 싸워서 얻는 평화는 결코 평화가 아니다. 평화를 얻더라도 피를 남기지는 말자. 차라리 조용해지자. 고요의 평화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구섬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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