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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길

by 제이티

백은서




칼 야스퍼스는 "인간은 불완전함 속에서 결과를 찾아간다"고 말한다. 인간은 그 자체로 불완전하며, 그 속에서 진리나 해답을 찾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영웅에게 기대하는 완전함이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영웅은 결국 불완전한 인간에 불과하며 영웅이 제시하는 해결책 또한 불완전함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영웅을 신격화하고 그에게 의존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외면하고, 그 영웅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영웅은 반복적으로 악당과 폭군이 되는 순환 속에 갇히게 된다.


영웅이란 존재는 언제나 그 자체로 변덕스럽고, 대립하는 양면성을 지닌다. 처음에는 사회의 불합리나 악을 처치하는 이로 등장하지만, 그가 쌓은 권력은 곧 그를 폭군으로 변모시킨다. 이와 같은 패턴은 반복되며 영웅은 한순간에 악당이 되어 사람들을 억압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웅은 여전히 자신의 행동을 올바른 길로 믿고, 새로운 적을 찾아내며 다시 영웅으로 돌아온다. 이 반복되는 과정은 영웅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는 항상 절대적인 정의를 내세우지만, 결국 그 정의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왜곡되고, 또 다시 악으로 변질되곤 한다.


카뮈의 <이방인>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불완전함을 묘사한 작품이다. 주인공 뫼르소는 그 어떤 영웅적인 면모도, 특별한 정의도 지니지 않는다. 그는 그저 세상이 요구하는 방식대로 살아가지 않으며, 무관심하게 세상의 규범과 도덕을 거부하는 인물이다. 뫼르소의 존재는 영웅이 아닌 오히려 사회에서 철저히 이방인처럼 격리된 존재로 그려진다. 그는 영웅이라는 미명 아래 세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가 속한 세계의 의미 없음을 인정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존재한다. 카뮈는 이를 통해 우리가 상상하는 영웅이란 개념 자체가 얼마나 허구적이고, 그 본질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일깨운다.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사회의 기대를 저버리고, 주어진 상황에 대해 감정적으로 무덤덤하게 반응한다. 이로 인해 그는 사회에서 이해받지 못하고, 결국 살인죄로 기소된다. 그러나 이 살인 사건은 그가 악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그가 세상의 규범에 맞지 않게 행동했기 때문이었고, 그에게 어떤 영웅적인 의도도 존재하지 않았다. 뫼르소는 그저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했을 뿐이다. 그는 영웅처럼 전통적인 정의를 내세우지 않고, 세상과의 마찰 속에서 오히려 불완전하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존재할 뿐이다.


영웅이란 존재는 바로 이러한 불완전함을 간과한 채 자신을 신격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는 세상의 불평등을 바로잡고, 악을 처치하는 존재로 떠오르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이 행하는 폭력과 억압의 무게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 영화 『듄』의 주인공 폴 아트레이드는 바로 이러한 영웅의 전형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예언자처럼 등장하지만, 그는 점차 성스러운 전쟁을 이끌면서 폭력과 권력의 본질에 직면하게 된다. 폴은 하코넨 가문을 무너뜨리기 위한 전쟁을 시작하지만, 결국 그 전쟁은 더 많은 피를 부르고, 그가 꿈꾸었던 이상은 점차 폭군의 길로 변질된다. 폴은 결국 자신이 처치했던 악과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영웅이 되려는 의도가 결국 또 다른 악을 만들어내는 아이러니 속에서 우리는 영웅이라는 존재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고 순환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사실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지만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아한다. 다만, 세상에 결과가 없는 것은 없다. 끝이 없는 것은 없다. 불완전한 삶 속에서 결과를 찾아나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어쩌면 그 여정이 우리 삶의 이유일지도 모른다. 카뮈의 뫼르소처럼, 우리는 세상의 규범을 따르지 않더라도,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가며 살아가는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영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영웅을 찾아서도 안된다. 영웅이라는 것을 맞닥뜨리게 되면 우리는 인간으로써 살아가는 이유를 잃게 될것이다. 그저 불완전한 존재로서, 함께 고민하고 협력하며 나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이자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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