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가람
다들 한번쯤 살아가면서 ” 나도 저런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 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유전자를 향한 원망과, 연예인, 명문대 졸업생, 특정한 분야에서 특출나게 잘하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의 유전자를 향한 갈망을 표한다. 그래서 이 두 감정과 바람을 동시에 해결 할 수 있도록 개발해낸 인간의 생명윤리 기술의 큰 폭풍을 몰고온 유전자 가위, ” 크리스토퍼 가위 “ 이다.
이 크리스토퍼 가위는 마치, 신의 손길과도 같았다. 이 크리스토퍼 유전자 가위는 암 유전자나 난치병, 불치병 등의 질병 유전자를 물려주지 않도록 그 유전자만을 잘라, 다른 평범한 유전자로 바꿔넣는 기술의 목적으로 개발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 유전자 가위를 사용하면서 더이상 자식들에게 질병 유전자를 물려주지 않고, 건강한 자식으로 낳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유전자 가위를 사용 할수록, 더욱 기술이 발전하며 시대 저물수록, 신의 손과 같았던 유전자 가위는 점점, 그 의료의 목적에서 벗어나, 다른 목적으로 남용되기 시작했다.
유전자 가위는 아이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하지만, 사회적인, 윤리적인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다. 바로 배아의 문제처럼 말이다.
배아의 문제란, 이는 두 입장이 갈라져서 암 유전자에게 배아를 대신하는 의료기술과, 의료기술을 시험할 때 배아를 사용하거나, 배아에게 직접적인 영향이 끼쳐 배아가 죽어가는 문제를 “ 배아는 생명체가 아니니까, 효율적으로라도 그렇게 사용하는게 맞다 ” 와 “ 배아는 생명체가 맞으니, 배아를 하나의 생명체로 여기고 더이상 배아를 이용한 기술개발을 금해야한다 ” 와 같은 입장으로 나뉜다.
나는 이 배아의 문제에서 배아는 생명체가 맞다는 주장편에 서겠다. 배아는 비록, 아직 제대로 된 형태와 장기, 기관과 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이는 우리가 꽃을 심을 때 심는 씨앗과 같은 형태이다. 꽃이 되기 처음의 단계 말이다. 배아는 뱃속이라는 흙 안에서, 영양분과 산소, 물을 섭취하고 그 안에서 형태를 갖추고 성장하기 시작하며, 이 배아가 성장하고 출산이 되는 아기가 바로 우리가 거쳐온 단계이다. 배아는 그저, 아직 준비되지 않은 씨앗같은 존재일 뿐이다. 우리는 이 배아를 이용한 기술을 배아가 살아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진행해서는 안된다. 배아라는 씨앗이 있어서 우리가 태어난 것이고, 배아가 있기에 생명이라는 꽃이 자랄 수 있고, 생명이 시작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무리 배아가 장애를 가지고 있는 상태더라도, 아직 숨도 쉬지 않은 쓸모 없는 개체처럼 여겨져도 이것은 생명이 숨을 쉬는첫 단계이자, 첫 출발점이다. 우리는 배아일때부터가 인간이다. 그저 형태가 갖춰지지 않은 인간. 세상을 보기전 눈을 뜰 준비를 하는 인간 말이다.
이처럼 사회적 문제와 윤리적 문제 뿐만 아닌, 유전자 가위는 그로 태어난 많은 아이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부여한다. 부모들은 점점 굳이 자를필요 없는 자식의 유전자를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망설임 없이 잘라버리고, 그 유전자에 더 좋은 유전자를 집어넣고, 마치 아이를 자신의 그저 자랑거리의 불과한 장난감처럼 만들기 위해 최고의 유전자들을 여기저기 끼워맞췄다. 이 유전자 가위로 태어난 아이들은, 자신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며 자신의 인생이라는 정원을 가꾸고, 고난과 역경, 실패와 성공, 행복과 슬픔 등 많은 경험과 감정, 성취들을 느껴보면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정원을 가꿔야 하지만, 이 아이들은 이미 뱃속에서 부모가 고난과 실패, 슬픔 등의 부정적인 경험은 겪지 못하도록 이미 가꿔진 상태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라, 그들은 자신의 유전자에 대해서 슬퍼할지는 몰라도, 아마 기쁨으로 번질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유전자가 조금은 덜 모자라거나 부족했으면 좋겠다던가, 자신에게 주어진 큰 우월함과 열등감 보다도 더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거나, 언제나 완벽하게 일을 해내던 자신이 실패를 마주했을 때, 남들보다 실패에 대한 경험이 적기에, 방황 할 수밖에 없을 수도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유전자 가위를 이용해 자식을 나으려는 부모들은 무슨 의도가 있기에 유전자 가위를 사용하는 것일까? 이 부모들은 아이를 향한 갈망이 존재한다. 자신이 어릴 때 해보지 못한 것을 자신의 아이를 통해 성취해 내려고 하는 것. 부모들은 항상 말한다. “ 엄마때는 이런게 없었어, 아빠때는 이런게 없었어, 그니까 열심히 해봐, 그니까 한번 해봐, ” 등등 말이다. 이미 그들의 청유문에서는 우리의 결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정해져 있는 질문이였다. 무엇을 물어보는 간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든 우리는 무엇을 할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수학 학원을 다니기 싫어도, 특별 과외를 하기 싫어도, 우리는 이미 할일이 정해져 있는 인생을 살고 있기에, 우리는 점점 무기력 해질 수밖에 없다. 내 의견은 이미 저 멀리, 내 인생이라는 골목에 두고 왔으니까 말이다. 더이상 이 삶은 내 삶이 아니게 된 것이다. 부모들이 주도하는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은 정작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른다. 어릴 때부터 수동적인 아이들이였기에, 부모님이 하라고 하셔서 했던 나이기에, 20살이 된 아이들은 자신이 독립을 하고 난 뒤에 묻는다. “ 내가 뭘 하면 될까요? “ 자신을 잃어버린 그들은 나 조차는 어디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길의 방향을 묻는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과잉 보호를 통한 부모들은 효율적인 것만을 따지며, 모든 것을 계산해 놓는다. 내가 여기서 운동을 안하면 뼈의 힘이 약해지고 언제 비만이 찾아올지, 내가 여기서 미술을 안하면 언제 내 미술 감각이 사라질지, 여기서 내가 이걸 먹지 않으면 언제 영양소가 부족해질지, 미리 미래의 내 습관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계산을 하고 과잉 보호를 하는 반면, 날 풀어두신 부모님들은 무책임한 행동으로 날 돌볼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말과는 역설적이게 나를 그들이 정해준 스케줄 속 울타리로 던져 놓겠지. ” 텐텐 하는 대신에 나머지는 너 알아서 해 “ 라는 입장으로 그런 부모들은 나를 학원살이에 맡겨놓고 모든 선택은 나에게 맡긴다. 하지만, 그 울타리 속에서, 뱅뱅 돌아가는 쳇바퀴 속에서 우리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여력도 없을 것이다. 그들이 선택을 하려던 참에, 진도는 저 멀리 나가져 있고, 나도 저기 까지 달려서 따라가야 하니까.
가장 좋은 부모는 그런 부모가 아닌가 싶다. 나를 고난과 역경에 던져 놓으시고 지켜보는 부모. 내가 이 실패를 어떻게 극복하는지 바라보시고 어떻게 하면 더 쉽게 극복해낼 수 있는지 비로소 몸과 마음, 감각으로 알려주시는 부모님. 가끔은 이성과 냉철한 모습으로 아이를 다독여가면서, 누구보다도 가장 따뜻한 마음으로 나에게 어떤 과자를 고를지 선택지를 주는 부모. 내가 아무리 그런 부모를 가지고 있더라도, 왜 행복해하지 않을까. 이보다 더 좋은 행복을 원해서 일까?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을 가지고 싶어서 일까. 그 무엇도 아니다. 비록 내가 좋아하는 음악과 운동을 하더라도, 내가 관심있는 과학 수업을 듣고 있어도 내가 더욱 행복을 갈망하는 이유는 아직 나를 몰라서 인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면 줌수업을 듣고, 줌수업이 끝나면 국어공부를 하고, 국어공부가 끝나면 수학학원에 자습을 하러 가고, 어느 날에는 과학 수업듣고, 어느 날에는 영어 학원을 가고, 어느 날에는 수학 수업을 하고, 드럼 수업을 듣고, 아침 일찍 과학 수업을 듣고.. 글로 다 담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빽빽한 스케줄을 가지고 있어서 일까. 방학이 되자마자 나에게 주어진 것은 엄마가 직접 짜준 방학 계획표 때문일까. 매일 학원을 뺑뺑 도는 나는 내가 왜 불쌍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이토록 공부공부 소리를 들으면서 살아야 할지를 모르겠다. 학원이라는 챗바퀴를 돌아가 내가 어디로 튀었는지를 모르겠다. 스케줄에도 담을 수 없는 나는 언제 찾을 수 있을까. 아무래도 내가 가장 행복할 때가 내가 찾던 나와 가까워서 행복을 갈망하는 것일까? 엄마, 나는 어디있나요. 내가 찾는 나는 어디있나요. 나는 도대체 어디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