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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by 제이티

유지민



어느새 국제 학교란 낮선 시스템 속에서 정착한지도 3년을 훌쩍 넘은 시간, 문화적 차이는 복도에서 선생님께 허리를 숙이는 대신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것부터, 올바른 정답에 가위자를 그리는 것까지 곳곳에서 마주한 이런 다름이 익숙함으로 녹아들기 까지는 수많은 “이게 맞나” 와 같은 되물음을 거친 후 이였다. 약 일년 전부터 모든 미들 수업에는 P&E 라는 참여, 성실도를 의무적으로 적용하게 되었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단원 평가, 프로젝트, 또는 기말 시험 보다도 최종 성적에 더 높은 퍼센티지를 차지하고 있는데, 매출석마다 매겨지는 이 점수는 수업 관련한 의미있는 질문을 해야만 받을 수 있다. 그저 가만히 듣고만 있다면 1점, 수업 후 선생님에게 말을 한 것으로 기억된다면 2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처음 이런 새로운 시스템이 도입되자, 나는 이에 따라 발표를 활발하게 하는 대신 눈치를 보며 오히려 시험 점수는 잘 받되, 매주 50 퍼센트에 그치는 이 참여도 점수에 발목 잡혀 원하는 만큼 높은 최종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한국인 정서가 그냥 그런 것일까, 전학생이 첫날부터 손을 번쩍 번쩍 드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그 아이를 ‘나댄다’ 라고 수근거렸다. 목소리는 내는 것이 관종이라는 타이틀과 같은 부정적인 시선이라는 값을 치러야 하는 사회가 형태를 잡게 된 것이다.


국제학교의 장점이 무엇인가를 묻는 다면 나는 동아리와 같은 교내외활동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현재 학생회와 MUN 클럽, TEDx 와 같은 학교가 주는 기회에 참여를 하고 있다. 8학년이 된 학생들은 학교 커뮤니티의 고쳐졌으면 하는 점들을 논리있는 건의서를 써서 학생회에 보내며 그렇게 우리는 수업과 수업 사이의 이동시간을 4분에서 7분으로 늘렸고, 번거로운 핸드폰 사물함은 사용 패지를 하였다. 또, MUN 은 계속해서 상대에게 반박론을 제기함으로써 점수를 얻고, 대학을 위한 상장을 얼마나 목소리를 내었는가 에 기준을 두고 나누어 준다. 마지막으로 TEDx 라는 스피치를 통해 우리의 작지만 굳건한 생각과 아이디어들은 어리다고 무시당하지 않고 경청하는 관객 앞에서 이야기한다는 경험을 쌓게 된다. “조용이해” 와 같은 우리에겐 친숙한 입막음이 비정상적으로 바라보아지는 문화인 것이다. 이런 개방적인 서양적 문화는 중학교에 들어서며 말 수를 잃게 되는 한국의 모습과는 상반된다.


그렇다면 목소리를 낸다는 것, 그것은 왜 중요한 것일까. 수퍼에고, 도덕, 그리고 본능 속 우리는 에고, 자아를 찾는다고 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이 두 힘을 가지고 저울질을 한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그저 무거운 쪽으로 기울게 되어 있는 나무 판대기 인 것이다. 그저 던져저 있는 곳에서 나를 밑으로 잡아당기는 방향으로 끌려가는, 주도권 없는 저울질 속에 갖혀 사는 것이다. 양쪽 무게는 서로 나 자신을 잡아당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우리의 자아는 사이의 틈을 채우며 형태를 잡게 된다.


본능을 주체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묘사에 사나운 곰, 그리고 어쩌면 다이어트를 3일도 되지 못해 포기하는 내 모습을 떠올릴 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아마 우리는 본능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그다지 극정적이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야만 이라는 단어와도 같이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저울의 반대 쪽에 자리잡고 있는 도덕에 대해선 별로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지 않다. ‘과도한 도덕’ 이라는 말이 없는 것처럼, 우리는 도덕은 많을수록 좋지, 이가 해롭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기독교에서는, 불교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종교에서는 ‘착하게 살라’ 라는 대목을 가지고 있다. 산타의 착한어린이 리스트, 나쁜 마녀를 죽임으로써 끝나는 어릴적 동화의 결말, 우리는 그렇게 계속해서 도덕을 따르라고 강조 받는다. 이런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책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속 작가는 도덕으로 가까워 질수록 우리는 약한 자아를 가지게 되며, 반대로 본능에 가까워 질수록 우리는 강한 자아를 보이게 된다고 한다. 약하다, 다시 말하면 이는 굴복 당하는 자를 말하기도 한다. 노예의 에고를 가지고 현대사회의 한국인들은 도덕의 억압 속에서 살아간다. ‘도덕성은 우리 시대를 지배 하는 이데올로기’ 라고 하는 것 처럼 ‘인성’ 을 실력 또는 이성 보다도 우위로 취급하는 우리는 오직 인사를 하기 위해서 머리 숙이는 것이 아닌, 그저 몸을 아래로 낮추고는 인생을 살아간다.

독일에서 교육의 기둥이 되는 이야기가 이렇하다고 한다. “모든 지배적인 지식은 지배하는 자의 지식”, 즉 단순한 지식을 묻는 것은 파시스트 교육의 전형이기에 위험하며 연습되선 않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모두 주관식 문제들, 그저 더 많은 양을 외우는 것으로 승부를 보는 경쟁의 모습을 띄고 있다. 발표 하는 손은 가면 갈수록 대기 속에서 어색함으로 변질되었고, 이들은 결국 밴드워건에 올라타 약한 자신의 자아의 홈을 번쩍번쩍한 명품과 진한 아이라이너로 매우려 하며 소비지상주의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우리 대한민국이 빠진 공허라는 질병 속 철학의 빈 곳은 물질적 사고로 잔뜩 덧칠 되고 만다. 종잇 조가리 마냥펄럭이는 우리의 에고는 그렇게 썬글라스 아래 충동적으로 예뻐 보이는 틴트와 방금 출시된 에어팟을 쓸어 담고는 SNS 에 한껏 자랑질을 마쳤지만, 어째서 남는 것은 알 수 없는 무기력함 뿐이다.


“괴물에 맞서는 자, 괴물이 된다”, 니체의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독재와 맞선 경험은 분명 있는데,민주주의 그 자체에 대한 경험은 없는 사정, 뭔가 언니 옷을 훔쳐 입은 어린 아이의 모습과도 같다. 민주주의 으뜸 국가라는 쇼윈도우를 전세계를 향해 자랑하듯 내보이지만, 정작 유리 너머에는 어설픈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혁명 따윈 없었다. 아픈 곳은 늘어나며 들어오는 병균과는 싸워 물리치기에 성공하는데, 완전한 치유의 방법에 대해선 무지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한편 나락, 도태, 인간실격에 대한 두려움에 한국의 청년들은 다리를 바들바들 떨면서도 낭떠러지의 또 다른 길은 없나 찾아보지 않는다. 그저 발자국을 찾아 그들을 따라 가기만 하는데, 조마조마 한 이 루트를 따라 달리는 마라톤 도중 많은 이들은 자결을 선택하기도 한다. 죽음 마저도 절벽 아래, 사람들의 비난과 저평가 보다는 나은 일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저 소비라는 수영장에 다이빙 하며 도덕이란 락스 냄새 속에서 헤엄을 친다. 이제는 안다. 과도한 도덕은 야만과도 같다.


유교문화와 민주주의의 단점을 모두 때려 넣고는 믹서기에 무작정 간 후의 결과, 그것이 지금 학국의 모습 아닐까. 알까기를 하듯 경쟁 속 절박한 학생, 직장인,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을 차례대로 튕겨내 바둑판 밖으로 보내버리는 그런 사회 인 것이다. 기적 같이도 나, 그리고 우리반 한국 학생들은 모르던 목소리를 서로에게 들려주고 있다. 새로운 익숙함이 나의 자아에 뿌리를 내린다. 이 뿌리는 조금만 햇빝의 각도를 바꿔주면 너 나 할 것 없이 바둑 판 위의 모든 이들에게 거센 공격에도 끄떡 없을, 말하여 “강한 에고” 가 되어 줄 것이다. 나 자신을 꽉 잡을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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