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뮬라시옹 #시뮬라크르
나이키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어린아이부터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까지 다른 브랜드는 몰라도 신발은 나이키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놈의 나이키 저기 저 뾰족하니 옆으로 찢어지는 게 살쾡이 눈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니면 썩소를 날리는 듯한 모양이기도 하다. 신발 하면 나이키지만 나이키 로고만 봐도 바로 신발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냥 신발도 아니고 세계 최고의 운동선수들이 땀이 묻어 있고, 조던이 3미터는 날아올라 덩크슛을 내리 꽃을 거 같은 환상이 들게 하는 신발이다. 나도 신으면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들의 거친 숨소리와 도전적인 땀방울의 축축함마저도 가슴속 깊이 다가온다.
지금과 달리 나의 학창 시절의 나이키는 부의 상징이자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제 나이키는 더 이상 운동할 때만 신는 신발이 아니었다.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자 집안의 부유함을 나타내는 척도이기도 했다. 나이키 신발을 신고 온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가 광고모델처럼 멋있어 보였다. 왠지 축구도 잘할 거 같고 농구도 잘하고 무엇보다. 자신감도 넘치고 이성에게 인기가 많을 것 같은 그런 그 못 가진 자들의 편향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런 이미지였다. 실제로는 그의 농구실력은 알 수는 없었지만, 누군가 조던을 신고 코트장에 들어온다면 우리는 십중팔구 대단한 실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지레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실력이 신발에 받쳐주지 못하면 그에 상응하는 조롱을 보내기도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는 일이다. 어이가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 어린 사춘기 시절의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광기 어린 나이키는 부모에게도 불효를 저지르게 했다.
어머니께서는 항상 그러셨다."저기 저 나이키는 티브이에 나오는 유명한 아들들만 신는 신발이다. 너 같은 놈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고작 신발 따위가 뭐라고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때는 그 말이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왠지 성공의 훈장? 징표? 그런 느낌이 가득했으니 말이다. 나이키를 못 사주는 부모가 원망스러웠고 상처 주는 말을 뱉었지만 무엇보다 그 신발이 나를 압도하는 게 느껴졌다. 다른 브랜드보다 조금 비싸고 왠지 디자인이 더 예쁜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 가슴팍에 달린 로고만 다를 뿐 똑같은 공장에서 하청을 주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른이 되면 성공해서 나이키를 마음껏 신어보리라~ 생각하며 공부를 했던 기억이 난다. 20살에 처음 아르바이트해서 신어본 나이키는 너무나 경이로웠다. 왠지 새 신발에 나는 냄새마저도 향기로웠고, 신으면 자신감이 생겨서 걸음걸이에도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신발이 불편하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발볼이 넓어서 폭이 좁은 나이키는 신을수록 피가 안 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놈의 나이키 아닌가? 곧 적응될 거라면서 마음을 다잡고, 돈이 생길 때마다 나이키 모자 티셔츠 바지 등등!! 나이키 병을 치료라도 하듯이 사모으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나는 나이키를 신고 나서 행복해졌을까?
그거 며칠 안 간다. 신발은 더더욱 불편하니까 안 신게 된다. 그런데 비싸게 주고 산거라 내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말도 못 한다. 혼자만의 인지부조화에 빠져 버렸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그렇다. 나이키는 허상이다. 실재는 고무가 아니던가? 고무하나 신는다고 인생이 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이유는 그 안에 담긴 광고 속의 이미지를 산 것이다. 마치 신으면 조던처럼 덩크를 할 것 같고, 광고 모델처럼 포기하지 않고 져스트 두 잇 할 것만 같은 환상 속에 나는 지갑을 열었다.
아이폰 광고를 봐보자. 절대로 성능을 강조하거나, 가격을 내 보이지 않는다. 세련된 음악에 감각적인 영상미가 돋보이고, 폰트와 이미지 하나에 곡선과 깔끔함에서 오는 아름다움을 어필한다. 코카콜라는 행복한 젊은 처자들이 콜라를 들고 세상 근심 하나 없는 표정으로 콜라를 열대병 쌓아놓고 눈을 지그시 감고 마신다. 설탕물인데 모델은 절대 뚱뚱할 리가 없다.
현대사회는 양말을 꼬매 쓰거나 입던 옷이 해져서 다시 사지 않는다. 매년 옷을 사고 갈수록 자동차 교체주기가 짧아지고, 핸드폰이 멀쩡 한대도 아이폰이 신상 나오면 바꿔야 하고, 이어폰이 분명히 있는데도 에어 팟을 사야 한다.
자본주의는 생산과 소비 두 날개가 있어야 날 수 있다. 초기 자본주의 사회는 그저 많이 찍어서 만드는데 혈안이었고, 만들기만 한다면 사줄 사람이 충분했지만 지금 후기 자본주의는 이미 모든 것이 넘치고 흘러있다. 동네에 비슷한 카페와 편의점 치킨집이 몇 개인지 세어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날개 하나라도 다치면 새가 추락하듯이 소비가 멈춘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사는 이 자본주의가 무너지지 않겠는가?
끊임없이 욕망하고 소비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지만 이미 집에 냉장고와 티브이와 신발과 옷은 있는데 말이다. 냉장고를 2~3개 살 순 없지 않은가? 10년 동안 무상 AS인데 말이다. 튼튼하고 질 좋은 냉장고를 만들면 이제 안 되는 시대다.
바로 답은 "광고"다. 광고 안의 세계는 세련되고 행복하고 근심 걱정이 없고, 트렌디하다. 나오는 연예인들은 하나같이 잘생기고 운동도 잘하고, 말도 잘하고 똑똑하다. 야무지다.
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은데, 얼굴과 키는 바꿀 수 없지 않은가? 손쉽게 그들처럼 되는 법은 간단하다. 핸드폰을 열고 결재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같은 신발과 같은 차를 사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묘한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
바로 이점을 광고는 끊임없이 부각한다. 상류층들에게는 과시적인 소비를 통해 남과 다름을 어필하고, 하류층에게는 이를 따라가도록 하는 소비를 권장한다. 전자가 공격적인 소비라면 후자는 방어적인 소비다. 우리는 누군가를 따라 하기 위해 혹은 누군가와 달라지기 위해 추격하고 도망가는 소비를 반복하면서 자본주의는 영속을 누리게 된다.
자 이제 생각해보면, 나는 나를 위한 소비를 한 것인지? 아니면 회사를 먹여 살리려고 소비한 것인지?
체제를 유지하고 위해서 소비를 한 것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쇼핑을 해도 사도사도 목이 마르고, 공허 하다면 말이다.
내가 백화점 아르바이트하면서 느낀 바...!!
하청공장이 같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