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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Mar 24. 2021

진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법


어딜 가나 모이면 주식 부동산 이야기만 하다가 간만에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처럼 대화하는 것 같은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철학에 대해 궁금증과 관심은 있었지만, 그 진지한 것(?)을 말했다가는 별난 놈으로 취급받기 십상이었다. 술자리나 카페서 이런 얘기를 시도해 보았지만, 친한 친구나 동료들도 머리 아프다고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선생이라고 가르치려 든다는 소리도 여러 번 들었다. 나에게는  상사 뒷담화 보다 연예인 가십보다 이런 게 재미있는데 말이다. 그러던 날 이런 진지한 것을 좋아하는 모임이 있었다는 게 너무 신기했고, 더 빨리 적극적으로 찾지 못한 나의 게으름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비록 줌 수업이었지만 책으로만 접했던 작가님을 본다는 것을 연예인을 보는 것 같이 설렘이 살짝 들기도 했다. 도대체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어떻게 생겼을까? 성격은 어떨까? 도대체 그는 어떤 사람을 살았을까? 글과 그 사람은 얼마나 일치할까? 비록 글과 사람은 달랐지만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이는 것이 때로는 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첫 수업의 주제는 "형이상학" 보기에도 딱딱해 보이고, 무겁기만 할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탈레스가 "물"이라고 먼저 칭하기는 했지만, 일상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듯하다. 오늘 아이들한테 가르쳤던 최대공약수와 최소공배수가 형이상학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것을 알아야 분수 덧셈 뺄셈도 하고, 약분도 하고 통분도 멋지게 해 낼 수 있다. 약수라는 개념을 이해해야지만 가능한 일이다. 만일 이 개념원리가 없으면 응용문제 못 풀뿐더러 결정적으로 수학을 포기하게 되면 입시에서 결코 좋은 성적을 받을 수가 없다. 즉, 형이상학은 결코 돈이 안 되는 게 아니다. 먹고사는데 지장이 있는 것이 공부라면, 공부의 핵심은 개념 아닌가? 그게 탈레스가 말했던 "모든 사물을 꿰뚫어 보는 게 아닐까?"  그런데 어느새 교육은 변질되어서 문제를 많이 풀고 정확하게 빠르게 쓰는 게 중요한 듯하다. 참고서와 문제집은 불티나게 팔리지만, '왜'를 묻는 철학이나 인문학 도서는 학교 도서관에도 언제나 대출이 가능하다.


왜 그럴까? 간단하다. 돈이 안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탈레스가 별자리의 움직임을 이해하고 올리브 기계를 독점해서 돈을 벌었듯이, 형이상학을 모르고는 돈을 벌 수도 없다. 다시 말해 철학은 돈이 된다. 심지어 재벌 총수들의 조찬모임에서 언제나 철학을 논하고, 삼성 이재용 부회장도 서울대 동양사학과 아닌가? 원래 부자들이 철학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철학을 통해 부를 창출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스티브 잡스 또한 철학과 명상에 심취해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알아야만 했다. 핸드폰을 얼마나 더 빠르고, 가볍게 만드는 것보다 사람들이 왜 사야만 하는지 그 "본질"을 말이다.


일론 머스크, 워런 버핏 같은 형님들은 주식의 본질을 이해했고, 존버 하라고 가르쳤건만, 나는 여전히 다 -300을 기록하고 있다. 아는 형은 주식의 본질은 차트라 하더만, 분명 10일선 그래프를 보면 이때쯤 떡 상한다고 했는데... 금리 머시기가 인상 됐다고 떡락했다. 그렇다면 주식의 본질은 금리일까? 아니면 기대심리 혹은 개미 형님들의 야수성일까? 자본주의 시장의 본질인 금융을 나는 아직 이해하지 못했나 보다.


이렇게 '본질'을 이용해서 돈을 벌 수 있는데 작가님은 돈벌이 수단으로 철학을 이용하면 중수 밖에 안된다고 한다. 여기서 사실 찔리기도 했다. 아이들한테 수업할 때마다 사람을 이해해야 결국 돈도 번다라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나를 알고 하는 소리인지 뜨끔한 기분도 잠시, 처음 보자마자 겉멋이 잔뜩 들어있다는 직설에 망치로 맞은 듯할 말이 없었다. 어떻게 알았지?? 철학과 역사에 관심이 있어 그간 공부를 했던 이유도 솔직히 나는 직업적인 이유가 크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면 강의 질을 올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한 명의 아이도 졸지 않게 내 강의에 집중하게 만들까? 많은 사람들에게 이 딱딱한 공부를 더 쉽게 풀어서 설명하면 더 유명해지고 돈도 벌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간 6년간을 달려왔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나의 본질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의 본질은 무엇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본질은 직업이니까.. 그렇다면 나를 설명하는 것은 교사일까? 그런데 교사가 된 지 이제 10년 간신히 지났는데, 그전에는 나는 무엇이었을까? 군인? 학생?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나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어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나의 지난 과거도 모르고 나도 사람들의 인생사를 모르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람을 처음 볼 때 자기소개할 때는 명함을 건네거나 자기 소속을 먼저 얘기한다. 학생들도 자기의 반 번호 이름을 모든 책에 쓰듯이 말이다. 의자가 앉기 위해 만들었고, 스마트폰을 게임하기 위해 만들었다면, 사람은 왜 만들었을까? 부모님의 실수가 아니라 사랑이라면?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을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아이들한테 왜 미래의 무엇이 될 거냐고 항상 장래희망과 꿈을 강요할까?.. 오늘도 진로 인식 검사를 하면서 하고 싶은 직업과 좋아하는 취미가 없다는 학생의 말에 또 한 번 멍해졌다. 맞다.. 나도 내가 이렇게 될지 모르고 성장했다. 그런데 매 번 교육환경은 아이들에게 무엇이든 뭐든 되라고 하라고 강요한다. 결코 아이들의 좋아하는 직업이 공무원이나 의사 일리가 없는데 말이다. 또한, 나도 내 미래를 모르는데 감히 아이들한테 뭐가 되라고 추천하는 것도 무책임하다. 


문명과 사회는 우리에게 "본질"을 강요한다. 학생이라면 이래야 하고 선생이라면 저래야 한단다. 그리고 모름지기 사람이라면 밥벌이를 해야 한다고 한다. 영화 '카타카'처럼 태어날 때부터 능력과 유전자에 맞게 직업과 역할이 정해져 있다면, 그리 고민할 필요도 없이 살 수는 있을 듯하다. 오히려 편한 삶이 될 수도 있겠다. 오늘 뭐 먹지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급식 식단처럼 그렇게 나도 계획과 일정대로 살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 계획대로 되는 것이 없는 게 인생이다. 너무도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나를 지탱해줄 등대 같은 본질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가 않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녀와의 사랑도 어이없는 일로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던가?..


'사람 일은 모른다'라는 말만 유일한 본질 인듯하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이 될지 물으며 답을 찾으려 했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간다. 어렸을 적에는 세계 최고의 댄서가 되고 싶었고,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재능과 노력의 함수 관계에서 나는 그 앞의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제는 엄마가 원하는 교사가 되었지만, 등록금이 싸서 그랬는지, 안정적인 직업을 원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안정적이지가 않다. 아니 어쩌면 한 번도 안정적 인적이 없었던 것 같다. 여전히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초조함이 밤마다 찾아온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이제는 더 이상 물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돼지가 죽기 전에는 자기가 삼겹살이 될 걸 알면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을 찾다가 결국 못 찾고 눈을 감는 게 인생인듯하다. 그리 재미있지도 대단한 것 같지도 않지만, 그래도 나는 오늘을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강아지 밥도 줘야 하고, 토요일에는 춤추러 가야 하고 오늘은 어제 예약해 놓은 육회가 오는 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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