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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Mar 31. 2021

아테스 형세상이왜 그래..

소크라테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일까?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나 자신을 소개해야 한다면 흔히들 나이와 직업을 묻기 마련이다. 대체로 ‘뭐하는 사람이에요?’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취미는 어쩌고 좋아하는 것은 어쩌고 해서 나를 소개하곤 한다. 수없이 썼던 자기소개서는 어떤가? 자기를 소개하는 글이라고는 하지만 누구나 알 수 있다.  "이게 진짜 너라고?" 어느새 ‘자기 소설’이 되곤 한다. 그나마 이 정도면 양반이다. 은행에서는 얼굴을 볼 필요도 없이 직업만 묻는다. 돈 빌려주는 사람은 그가 어떻게 생겼든, 좋아하는 취미가 무엇이든 간에 대출금을 얼마 만에 갚을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하지만 은행권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저는 꼭 갚을 수 있어요!"라고 소리쳐봤자 소용없다. 재직증명서니 서류니 하면서 2통씩 떼어오라 한다. 창구 앞의 직원이 마음에 들어도 절대로 번호를 물어볼 수가 없다. 그녀는 나의 통장잔고를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마이너스 통장 때문인지 아니면 나의 몰골이 초라해서인지, 여간해서는 자신감이 생기지 않는다. 마치 무슨 죄를 지은 것처럼, 쪼그라드는 기분이 드는 것은 왜 일까?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쓰여서 그런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좋은 모습,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기 마련이다. 집에 손님이 오면 평소 안 하던 방청소도 하는 것처럼 굳이 널브러진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나 손님은 어쩌다 오는 사람이지만 나는 매일 들어간다. 그때마다 집 상태가 모델하우스처럼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나는 누구일까?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 모습은 결코 엄마가 알고 있는 내 모습과 같지 않다. 당연히 회사에서, 가정에게, 친구관계에서의 역할은 다르니까 그때마다의 자아가 있다고 자연스럽게 배우고 느끼지만, 만약 그중에 진짜 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무엇을 골라야 할까?   

‘테스 형’은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하셨다. 누구나 아는 말이지만 어느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은 진짜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연기하며 이미지 관리를 한다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사생활을 보고 실망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인 듯하다. 하지만 그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과연 우리는 진짜 모습으로 살고 있나? 누구나 학교든 회사든 가정에서 가면 하나씩은 쓰고 살지 않는가? 아이들은 선생님 앞의 모습과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의 말투가 다르다. 집에서는 안 그러는데 학교에서는 말썽쟁이인 애들도 있고, 반대로 학교에서는 착한 모범생이 엄마 속을 썩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이 내 진짜 모습일까?  


내 친구 중에 번듯한 대기업을 다니면서 딸 둘을 가진, 누가 봐도 행복한 가정을 꾸린 친구가 있다. 언제나 인스타에는 여행 사진과 가족끼리 회식하고 웃고 있는 사진이 올라온다. 하지만 그 친구는 행복하지 않다. 행복해 보이려고 웃고 있지만 나는 안다. 왜냐하면 만날 때마다 "너는 절대로 결혼하지 마라!"라고 3번은 얘기하기 때문이다. 내 친구는 대기업 과장에 훌륭한 모범 가장이지만 불행한 남자인가? 그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혹은 다른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나를 안다’고 말하는 사람도 내가 보여주는 모습밖에 볼 수 없다. 또한 내가 본 사람도 그가 보여준 모습 밖에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을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어머니는 20년을 함께 살아도 사람 속을 모른다고 하는데 말이다.  


소크라테스 형은 이렇게 말하셨다. 너 자신을 알려면 네가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아 이 말장난 같은 말은 무엇일까? 모르는 것은 당연히 모르는 건데 어떻게 모르는 것을 알 수 있을까? 

내가 차 주인이라면 차 외관을 보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차를 타거나 내릴 때 잠깐일 것이다. 주로 운전자는 차 '안'에 있기 때문에 '밖'을 볼 수 없다. 새똥이 묻었는지, 바퀴에 비닐봉지가 꼈는지 알 수가 없다. 뒤차가 빵빵을 울리기 전까지 말이다. 바로 나를 알려면 사람들이 말해줘야 한다.  


"대화" -나를 아는 유일한 방법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에서 왜 그가 왜 옆모습으로 있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쉴 틈 없이 말하느라 바빴던 것이다.  


나를 알기 위해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어라. 그들은 모두 내 스승이 될 테니..  


자유롭게 마음 맞는 사람과 웃고 떠드는 것처럼 행복한 게 어디 있을까? 거기에 술과 고기만 있다면 아마 천국은 죽어서 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반대로 고기와 술이 있어도 마음에 안 맞는 사람과 대화를 주고받는 건 여간 곤욕스러운 일이 아니다. 한 명만 말하고 모두가 듣고 있어야 하는 그런 대화도 있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왜 말을 안 하는 것인지.. 회사생활을 조금이라도 했던 사람은 누구나 알 수 있다. 말을 하면 퇴근시간이 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물어보면 반대할수록 시간만 길어질 뿐이다.  


무슨 말을 할지 조심해야 되고 생각하고 눈치 보는 대화는 나를 알기는커녕 나를 감출 수밖에 없다. 만약 대화 중에 기분이 상하고, 언짢다면 그 역시도 말이다. 나 역시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사람들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던 것 같다. 주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무시한 적도 있었고, 내 말이 맞다고 우긴 적도 있었다. 그렇게 오만한 적도 혹은 권위에 위축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랑 코드가 안 맞아서 그래’, 혹은 ‘성향이 달라서 그래’ 하면서 벽을 세운 적도 많았다. 열린 마음으로 편견 없이 사람을 대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입은 그렇지가 않은가 보다. 그렇다면 진정한 대화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에 맞는 형과 동생이 있다. 이 두 명과 만나면 별 쓸데없는 얘기부터 진지한 얘기까지 다양하고 긴 시간을 한 호흡으로 떠들 수가 있다. 정치 경제 연예 이슈 회사 등등.. 물론 성향과 코드는 다르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면 이 두 사람은 나를 대단히 여기지도 불쌍히 여기지도 않는다. 그래서 아무 말이나 해도 그려려니 하고, 설령 말실수를 해도 그렇게 신경 쓰지도 않는다. 왜 일까? 내가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그들이 하는 말이 때로는 독하고 쓰지만 기분이 나쁘지가 않다.  


소크라테스가 우리에게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했던 진정한 의미는 자신을 알 수 있게 해주는 타인을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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