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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Mar 15. 2021

나는 왜 쟤가 싫을까?

자의식 과잉

"야~ 너 연예인 누구 닮았다. 혹은 너 누구랑 비슷하게 생겼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하지만 신기할 정도로 나랑 똑같이 생긴 사람은 없다. 심지어 쌍둥이도 하다 못해 발가락의 점은 다르게 생겼다. 외모만큼 성격도 다양하고 생각도 다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쟤는 우리랑 틀려!!"


틀리다는 말과 다르다는 말은 분명 의미가 다르지만 비슷하게 혼용해서 사용한다. 틀림은 옳고 그름을 가늠할 수 있을 때 쓰는 말이고, 다름은 그럴 수 없을 때 사용해야 한다. 무슨 국어 시간도 아니고 뭘 그리 깐깐하게 따진다고 할 수도 있지만 분명 한 사람의 언어는 그 사람의 생각을 드러낸다. 생각은 언어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너와 나는 분명 다르게 생겼지만 틀리게 생긴 것은 아니다. 흑인과 백인은 피부색이 다르고, 외국인은 우리랑 사용하는 언어가 다를 뿐이다. 하지만 틀리게 생겼다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분명 틀린 말인데 말이다.


동성애자와 이주노동자들은 우리랑 다른 사람들일까? 아니면 틀린 사람들일까? 말로는 '다름'을 존중하고 다양성을 위해야 된다고 말하지만, 솔직히 말해보자. 불편하다. 나랑 아무 상관도 없고, 심지어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왜 불편함을 느낄까? 내가 응원하는 축구 클럽의 라이벌 상대편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사람을 마주 보기만 해도 이유모를 적대감이 생긴다. 전쟁상황에 적국을 대하는 것처럼.. 어디 이뿐이겠는가? 좋아하는 연예인 음식 취미만 달라도 호감이 떨어지는데, 민감한 정치성향이나 성적 취향 세계관이 다른 사람을 보면 어떨까?? 불호를 넘어 혐오로 넘어간다. 댓글창의 편 가르기 만큼 사소한 이슈 하나라도 우리는 꼭 둘로 나누어서 혈전을 펼치는 모습을 자주 본다. 그래서 분단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름'과 '틀림'을 인정하지만 왜 나와 다른 사람들이 싫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스피노자의 '목적 원인'을 알아보자.


"인간은 항상 목적을 위해서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한다. 그들은 언제나 이루어진 것의 목적 원인만을 알려고 하며 그것을 들었을 경우에만 만족한다."   -스피노자


인간은 목적 지향적이라 그것에 따라 행동한다고 한다. 쉽게 이야기하면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목적은 단연 '돈'이다. 따라서 우리는 돈이 되는지 안되는지에 따라 움직인다. 그것이 주식이든 부동산이든 사업이든 심지어 연예와 결혼까지 말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호구'라고 부른다. 목적에 따라 살지 않은 사람들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마치 코로나 시국에 마스크를 벗고 다니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불쾌한 감정이 생긴다. 돈이 목적이니까 원인이 되는 것을 들었을 때 우리의 귀가 반응한다. 예컨대, 음식 장사하는 사람이 재료를 아낌없이 쏟아 맛에만 치중한다면, 필시 그 사람은 목적과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다. 어떻게든 목적(돈)에 맞는 것만 행동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원인(맛)에만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이상하고 틀리다고 여겨진다.


또한, 사람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기들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비와 바람은 그냥 있을 뿐인데 단비가 되기도 하고 홍수가 되기도 한다. 태양은 떠있을 뿐인데 햇살이 되기도 했다가 폭염으로 부르기도 한다. 오로지 인간에게 유용할 때만 긍정적인 단어가 쓰이는 것은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사고일 뿐이다. 들판 위의 버펄로는 가죽이나 고기가 되려고 태어난 게 아니지만, 우리는 그들을 마블링 얼마나 있어 고소한 가로만 판단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사물과 자연뿐 아니라 사람도 나에게 유용하면 "선"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악" 이 된다. 안중근은 영웅이지만 일본에서는 테러리스트이다. 숙적 이토 히로부미는 영웅으로 불린다. 우리 편일 때는 영웅 그렇지 않을 때는 범죄자이지 않은가?


 12345678 vs 1182589


어느 쪽이 질서이고 무질서일까? 우리의 감각기관에 편한 쪽이 질서라고 부르지 않은가?  이처럼 인간은 자기 중심성에 따라 세상을 둘로 나눈다.


그렇다면 다시 왜 나는 특별한 이유 없이 저 사람이 싫을까?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배우지만 말처럼 잘 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왜냐하면 인간은 모든 존재 자체를 목적 원인으로 보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를 인간의 이익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산 들 바람 비 태양을 넘어 사람까지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사람은 모두 동등하다. 나를 비추기 위해 태양 같은 사람은 없고, 부모님은 나를 위해 돈을 무조건 벌어와야 하는 존재는 아니다. 바로 이 사실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 예전처럼 신분제 사회면 당연 노예는 주인을 위해, 백성은 왕을 위해 존재하는 게 당연해서 목적 원인으로 삶기 편했는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성소수자, 정치성향이 다른 사람, 난민, 장애인, 능력이 우월한 사람, 혹은 나보다 가진 게 없는 사람, 피부색이 다른 사람, 말투가 다른 사람, 사는 곳이 다른 사람, 대학 학력이 다른 사람, 소득 수준과 차의 배기량이 다른 사람이 불편한 이유가 그 사람들은 나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굳이 싫어할 필요까지 있을까?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말이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과잉된 자의식"이라 말한다.


"모든 사물이 자신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자의식"


이른바 센터병!! 내가 주목받아야 하고,  내가 이야기할 때는 내 눈을 봐야 하고, 나랑 생각이 다른 사람은 기어코 설득하고야 만다. 타인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말로만 위한다고 하지만, 친구나 연인도 나에게 도움을 주는 친구, 나랑 생각이 맞고 코드가 맞는 인사들로만 채우지 않았던가?  


누군가가 나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싫어질 때, 돌멩이를 생각해보려 한다. 돌멩이는 그냥 있었다. 그런데 내가 길 안 보고 걷다가 걸려 넘어진 것이다. 결코 재수 없는 돌멩이가 아니다.


우주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고 타인도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다.


그냥 거기 있었고, 나는 아무런 이유도 원인도 없이 여기 왔을뿐 세상을 구하러 온것도 아니며, 당신을 위해 태어난 것도 당신이 나를 위해 태어난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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