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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Mar 12. 2021

왜 중독에 빠지는가?


유튜브, 게임 , 담배 , 술 , 도박 , 주식 , 섹스, 야동 , 설탕 , 맛집 , 밀가루 , 커피, 스마트폰, sns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렇다. 중독이 된다.  꼭 이런 것은 재미있는데 몸에 해롭거나 사회에서 금기시하는 경우가 많다. 살찌는 음식은 그렇게나 맛있지만 달고, 짜고, 기름지다. 매일 밤 치킨의 유혹을 참치 못하고, 다음날 먹고 후회하지만 매일 밤마다 그 달고 시원한 유혹은 뿌리칠 수가 없다. 하루에 유튜브는 몇 시간이나 볼까? 인스타그램의 화려한 언니들과 놀러 갔다 온 부자들의 스웨그 사진을 왜 자꾸만 클릭을 하게 될까? 오지도 않은 카톡창을 수십 번 들여다 보고 빨간색 알림 톡을 지우는 게 일상이다. 우리 모두 누구나 작은 것 하나에 꽂혀서 살아가지 않는가?


중독이란 무엇일까? 쉽게 말하면 어떤 것에 푹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중독은 세상을 두 가지로 나눈다. 중독 대상과 그 나머지로 말이다.

중독된 대상(술/도박/주식)에 빠지면 그 나머지(친구/가족/여행)등은 무의미하게 여기게 되는 게 바로 중독이다. 게임과 주식과 술에는 빠져들지만 이상하게 공부나 운동에 중독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상하게 나라에서 하지 말라는 것은 재미있고 중독되지만, 엄마가 하라고 시키는 것은 중독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로 중독이 되려면 '기쁨' 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게임에 중독된 학생은 학교에 있을 때도 게임 속 세상을 더 상상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게임을 생각할 때 더 신체가 반응하고 피가 돌아가기 때문에 다시 말해 기쁨이 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쁨'은 삶의 활력을 크게 해 주고, 더 생생하게 하는데 왜 중독은 우리의 영혼을 파괴한다고 할까? 재미있고 기쁘면 그게 행복이 아니던가? 그런데 인간사는 기묘해서 꼭 기쁜 게 행복하지만은 않은가 보다. 인사이드 아웃에서 슬픔 이가 있어야 기쁨 이가 있듯이, 마냥 기분 좋은 게임만 한다고 인생이 온전해지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중독은 어떻게 이루어 질까? 커피를 처음 맛본 사람은 커피 맛을 모른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계속 먹듯이 일단 우리는 신체와 어떤 사물이 닿았을 때 기쁨을 느껴야 한다. 그 사물에 자꾸만 손이 가다 보면 중독이 된다. 한번 맛을 보면 다른 것은 찾지 않은 것처럼 강렬한 맛과 강한 자극 때문에 계속해서 탐닉하게 되고 그렇게 중독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게임을 자주 하지만 중독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친구도 만나고 가족과의 시간도 보내고 술도 먹고 책도 읽고 게임도 하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분명 그 사람이 게임을 좋아해서 자주 하지만 게임만 하는 사람과는 다르게 그는 중독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게임 이외의 세상이 없는 게 아니라 다양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새로운 도식이 필요하다.


 ( ? ) ----> 기쁨 ----> 반복적 행동 ----> 중독


( ? ) 안에 들어갈 답은 무엇일까? 게임중독과 알코올 중독에 걸린 이유가 단순히 그것이 기쁨을 줘서 중독에 걸리는 게 아니다. 하던 일이 잘 안되고 생계를 책임지지 못한 자책감과 불안한 내일에 대한 두려움과 알 수 없는 감정에 뒤엉커 공포가 찾아올 때 그때 우리는 절망의 끝에서 게임 속 세상으로 들어간다.  가상의 공간은 현실의 찌질함과 치사함을 잊게 만들고 세상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만든다. 그것이 게임이든 술이든 도박이든 주식이든 말이다.


바로 답은 '절망'이다.


중독은 절망의 끝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발버둥이다. 모든 사물은 자기가 살기 위해 생존본능이 있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돌멩이도 나무도 사자도 시냇물도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한다고 한다.

이른바 '코나투스'라 하는데 사람으로 치면 '의지'와 '충동'이 되겠다. 목이 마르면 물을 갖고 싶은 의지와 마시고 싶다는 충동이 생긴다. 추운 곳에 있으면 따뜻한 곳이 생각나고 어떻게든 몸에 열을 내려고 쪼그리게 되지 않는다. 만약 코나투스 인간에게 의지와 충동 이런 게 없으면 생존이 어렵다.


바로 중독은 코나투스가 발현된 것이다. 그것도 가장 힘든 순간 절망 위에서 어떻게든 살아내려는 발버둥.

내일이 온다고 상황이 나아질  같지 않을 , 어제와 같은 힘든 날이 반복된다면 어떻게 살아갈  있을까? 그래서 중독은 어리석은  아니다. 게임중독에 걸린 학생은 분명 학교나 가정에서 어떠한 재미와 의미를 찾지 못한 학생일 가능성이 크다.


게임도 하는 아이와 게임만 하는 아이는 다르다. 만약 게임중독에 걸린 아이를 억지로 금지시키면 어떨까? 무기력증과 우울증이 오게 된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게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중독된 사람들 일방적으로 비판할  없다.


그가 중독에 빠진 이유를 우리는 모르니까 말이다.


하지만 분명 중독은 최악은 아니지만 차악이다. 다양한 세상을 중독된 세상과 아닌 세상으로 보는 삶은 너무 불행하다. 무지개의 7가지 색을  보고 사는 삶은 결코 온전한 삶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중독에서 벗어날  있을까?


바로 중독의 원인인 '절망'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절망은 불행한 현실일까? 아니면 현실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전자가 사실이라면 후자는 망상이다. 코로나 19 때문에 자영업자가 몰락하고, 일자리를 잃고 집값은 치솟고,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힘들지만, 어떤 이들은 덕분에 자산이 늘고, 빈부의 격차는  심해졌다. 이제는 벼락부자가 아니라  순간에 벼락 거지가 돼버린 현실에서 어떻게  누구든 절망하지 않을  있겠는가?


그런데 스피노자는 절망의 원인을 사회구조가 아니라 개인의 내면으로 돌리고 있다. 마치 어른들의 라테는 말이야~처럼 그의 말이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그가 지금 대한민국에 살고 있으면서 매일 같이 쏟아져 나오는 뉴스를 보면 저런 말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솔직히 지금 나는 예전보다   먹고  사는  맞다. 메뉴를   가격이 아니라 이름을 보고 시키고, 적어도 내가 먹고 싶은 것은 마음껏 먹을  있는 경제적 여유는 있다. 남들  가지고 있는 (자가) 없지만, 차도 있고 심지어 귀여운 강아지도 키우고 있다. 남들이 봤을 때는 부러운 삶일 수도 있지만 나는 여전히 답답하고 가슴이 막힌다. 무엇 하나 이룬  없는  같고, 뚜렷한 성과가 보이지 않을 , 글을 써서 무엇을 하고, 책을 읽어 무엇을 하나?  나는 그렇게 영상 넘어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에 한이  이유를 생각해보면 아마 과거의 달갑지 않은 가정사가 한몫인  같다.


어렸을  아버지는, 매일 열심히 일하셨지만, 술에 자주 취해셨고 어머니와 많이 싸우셨다. 내가 기억하는 결혼과 가정은 교과서에 나오는 화목한 4 가족이 웃고 있는 장면이 아니다. 항상 어머니는  강하게 키운다면서 끝없이 다른 아이와 비교하  틈을  주셨다.  버느라 일하느라 여유가 없어 가족과 함께 놀러 갔던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돈돈돈 그러셨고, 어린 나이에 그게 인생이 답이라 생각했다. 인정받아야 했으며, 언제나 밥을 먹기 위해서는 돈값(공부/성적) 했어야만 했다.


돈만 있으면 행복을   있을 거라 생각했다. 생각이 아니라 그때는 돈이 절실히 필요하기도 했다. 그래서 계속해서 돈을 벌어야   같은 불안감이 나를 지배했다. 쉬면    같고 뒤쳐질  같은 불안감  없는 공포. 거기에 분명 나는   자고 이것저것 하는 것은 많은데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을  같은 허무함이 밀려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달리기를 미친 듯이 하거나, 운동을 4시간씩 했다. 몸을 가만히 두면 잡념과 망상이 떠오르니 말이다. 그러다가 술에 빠져 매일  술을 먹기도 했다. 잠시나마    없는 공포를 잊기 위해, 막연한 불안감을 지우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트라우마친구나 연인을 만날 때도 관계를 망치게 했던  같다. 언젠가 아는 형이 이런 말을 했다.


"A도 B도 떠난 이유가 네가 못나서가 아니라 불안해하는 너를 계속 볼 자신이 없어서 그런 거 아니냐"


 망치로   맞듯이 애써 웃고 있었지만  말이 없었다. 티비에 나오는 성공한 사람들의 고생한 미담이 언젠가 나의 스토리일 거라 생각하고, 그렇게 강의 준비에 중독된 나날을 보냈던  같다. 그런데 현실은 재능과 노력의 함수처럼 냉정했다.


음악방송을 틀면 모르는 신인가수가 매주가 데뷔를 한다. 그 중 우리가 기억하는 가수가 몇 명이나 될까? 무수히 많은 무명 가수들이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중  사람이 내가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밀려오자.. 그때부터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다. 대신 매일  술이 찾아왔다.. 거기에 신세한탄까지.. 이런 모습을 계속 지켜볼  어서 그때의 우리는 헤어졌나 보다.


취한 세상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불안과 고독은 이내 사라지고,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하지만 다음날이면  다른 걱정과 불안이 밀려오지 않은가?..


솔직히, 지금 있는 그대로 나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다. 직장도 있고, 강아지도 있고 소고기도 술도 매일 먹지 않은가?  티브이에 나오는 강사가 돼야만 행복한 삶은 닌거 같다. 지금도 아이들을 가르치고, 하다 보면 묘한 희열을 얻는다.


있는 그대로  모습을 바라보면서, 불행한 현실을 안에서 걱정만 하지 말고 그냥 이런저런 일을 하면 된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고, 언제나 뉴스에서는 부조리가 가득한 기사가 흘러나오지만, 그렇게 절망할 필요가 없다. 세상은 성공과 실패 두 가지만 있는게 아니다.


학창 시절 매를 맞기 전에 가장 두렵지만 맞고 나면 고통은 금방 잊힌다. 어쩌겠나?...


절망은 그저 환상이다. 실제 느끼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에다가 두려움과 불안까지 합쳐진 것. 논산 훈련소 앞 입소하기 전의 마음이랄까? 물론 그곳이 낙원은 아니지만 살수는 있는 곳이다.


지금 내가 절망이라고 생각하는 현실이 누군가에게는 일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부끄럽기도 하다.


지금 나는 여전히 술을 마시지만 중독은 아니다. 이제는 음악도 듣고, 사람도 만나고, 이야기도 자주 하고, 춤도 추고, 강아지랑 산책도 즐긴다.


꼭 대단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은 부모님을 원망하지도 않는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이선균의 대사처럼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다." 과거의 기억은 새로운 기억으로 얼마든지 대체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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