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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Mar 03. 2021

죄를 안 짓고 살 수 있을까?

플라톤 / 아리스토 / 헤겔 / 온전한 삶이란?

매 번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이유로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었던 기억이 있다. 분명 그 말을 해서는 안됐는데 하며 후회하는 기억들이 스쳐 지나간다. 나는 왜 별 것도 아닌 일에 그렇게 신경이 쓰일까? 나에 대해 사람이 어떤 말을 하고 다닐까? 생각하며 밤잠을 끙끙대던 기억. 지나간 기억을 뒤로하고 새로운 사람들과는 새로운 마음으로 잘 지내보리라 다짐하고 정든 고향도 떠나고 연고도 옮겨 봤지만, 도망친 곳에 낙원이 없다는 그 말은 정답인 듯하다. 신기하게도 학창 시절 군대와 회사를 다니는 지금까지 사람만 바뀌지 비슷한 갈등 혹은 새로운 갈등이 생겨난다. 울컥하고 화를 냈던 기억과 속으로 억울함을 삭이던 기억까지, 알고 보면 모두 착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여간 사회에서 만나는 인간들을 그렇지가 않는가 보다.

 

 처음에는 모두가 그렇듯이 나만 빼고 다 이상한 또라이라 생각했다. 내가 예민하거나 별난 게 아니고 운이 없어서 나쁜(?) 사람들을 만났다고 말이다. 하지만 세상은 나의 의지와 새로운 결심을 비웃는 마냥 나를 죄인으로 만드는 듯하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성경에서는 애초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부터 우리는 죄인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그 열매를 신의 허락을 맡지 않고, 함부로 먹었다는 것이다. 마치 엄마 없을 때 지갑에 몰래 손을 대듯이 최초의 인간은 "자유의지"라는 것을 행할 때부터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누우면 눕고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을 마시는 것을 넘어, 지능과 의식이 생긴 순간 어김없이 인간을 죄를 짓는다. 하지만 이 말에는 모순이 있다.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 아직 죄를 지을지 안지 을지 모른다. 자유 자체가 죄가 될 수는 없다.


여기에 플라톤은 더 나은 제안을 제시한다. 죄를 짓고 사는 이유는 간단하다.

"온전한 삶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무식해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가령 착하게 산다는 건 무엇일까?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가? 좋은 엄마란? 좋은 선생님은 어떤 사람일까?

엄한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일지 다정한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일까? 좋은 엄마는 마트에서 떼쓰는 아이에게 등짝을 후려 갈길 것인가? 좋다 착하다는 개념 그 자체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좋은 남자 친구는 능력 있는 남자인지? 내 말을 잘 들어주는 남자인지? 아니면 키가 커야 하는지 아이돌을 닮아야 하는지 점을 몇 개여야 하는지 정의할 수가 없지 않은가?  


가령, 아프리카 우물을 파주는 일이 선한 행동이라 생각하고 기부도 하고 했지만, 오히려 우물을 파자 땅값이 올라가서 원주민이 쫓겨나는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 선한 동기가 선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은 이유는 '선함' 무엇인지 제대로 몰랐기 때문이다.


제대로 '앎'을 강조했던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는 그것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의지'와 실천력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건강한 삶을 위한다면 당연 누구나 운동을 해야 하고,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상식을 알고 있다. 운동하는 방법은 3초만 검색해도 수 십 개가 나오고 공부하는 자료는 인강에다가 위키백과가 널려있지만 안 한다. 왜? 귀찮으니까~~ 분명히 아는대도 말이다. 무단 횡단하면 안 되고, 술 한잔 하고 핸들을 잡으면 안 되는 이유를 모르는 사람이 없어서 벌금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굉장한 차이가 있다. 입으로만 운동하고 눈으로만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유튜브가 아니라 지금 당장 엉덩이를 들게 만드는 엄마의 고함에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만 비교하면 간단하게 제대로 알고, 행하면 그뿐인데 그렇게 산다고 제대로 살 수 있을까?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운동하고, 심지어 강아지 똥도 줍는 모범시민에다가 세금도 따박따박 내는 데 밤잠 설치는 죄책감 와 후회스러움을 무엇일까? 그냥 성경에서 말하듯이 '자유의지'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일까? 코로나 시국답게 집에만 있으면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까 아무 '죄'도 짓지 않게 될까?


하지만 인생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인간 세상은 복잡하고 미묘한 데다 이상하고 언제나 미친놈들은 주변에 넘쳐흐르기 때문이다. 제대로 알아도 아무리 의지가 있어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옳다고 믿었던 것들이 서로 부딪히기 때문이다. 헤겔은 도덕은 딜레마가 있어서 인간은 선과 악 사이가 아니라 선과 선 사이에 갈등을 한다고 한다. 전쟁은 왜 일어나고, 싸움과 폭력은 왜 끊이지 않을까? 히어로 영화처럼 악의 무리가 지구를 침략한다면 막기만 하면 그만인데 말이다. 전쟁이 슬픈 이유는 착한 사람들이 착한 이유로 서로를 죽이기 때문이다.


레미제라블은 명확하게 이를 보여준다. 조카를 위해 빵을 훔쳤던 장발장은 고민을 한다. 가족을 살리려면 법을 어겨야 하고, 법을 지키려면 가족을 굶기는 무능한 가장이 된다. 비슷한 사례라 뉴스에 나와서 가슴이 아픈 적이 있다. 실직한 가장이 마트에서 아이 분유를 훔치다 적발된 것이다. 우리는 그를 뭐라고 욕을 할 수 있을까? 무능한 가장? 법을 어긴 범법자?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그가 법을 어겼지만 그는 적어도 자식을 살렸다는 양심의 가책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법을 지켰다면  죄를 짓지 않지만 그보다 큰 죄책감이 밀려와 과연 남은 생을 살 수나 있을까?  간혹 법의 심판보다 양심의 심판이 더 가혹한 법이다.


어디 책이나 드라마 뿐이겠는가? 효자 남편은 좋은 남편이 되기 힘들고, 성실한 사장님은 나의 지각을 허락하지 않는다. 때론 좋은 의도로 말했지만, 오해가 사기도 하고 별 뜻 없이 던진 말이 누군가에게는 큰 상처가 되기도 한다. 똑 부러진 사람이 되고 싶은데 정 없어 보이는 사람이 되기는 싫다. 그렇다고 막 퍼주는 사람은 호구처럼 보이기도 하다. 할 말 다하면 속은 시원한데, 남은 속은 열불이 난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말을 계속 들어줄 여유와 아량은 없다.


무엇을 하던 어떻게 하던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나를 싫어할 이유를 만든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도 죄는 계속 만들어진다. 어제와 똑같은 삶을 살지 않더라도, 다른 이유로 다른 사람들이 다른 장소에서 같은 죄를 만들게 한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사는 건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인데 그런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살기도 힘들고, 그렇게 살았다간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게 된다. 역대 왕 중에 모두에게 존경받는 왕은 없었고, 지금 어느 나라 대통령도 50프로 지지율이 나오지가 않는다. 누군가에게 좋음이 다른 이 에게는 나쁨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 뭐 먹고 싶어?라고 물어봤을 때 너 먹고 싶은 거 먹자라고 말하는 친구는 자기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잊어먹게 된다. 남에게 맞추는 삶은 미덕이 아니라 자신을 점점 잃어가는 것이다.


그녀가 떠나갔을 때 말했다. 너는 곁에 있어도 곁에 있는 것 같지가 않다고...


이제야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렇다고 내가 내일 다른 사람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이제는 후회하기도 싫고, 자책으로 밤을 지새우는 거 그만하고 싶다.


곁에 있을 때 잘해야 한다는데? 다시 물어보자..


잘하는 게 뭘까? 알아도 할 수 있을까? 잘한다는 것들이 서로 부딪히지 않았을까?


 잘해줘도 떠날 사람은 떠난다..




넌 내게 핑계를 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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