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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Dec 23. 2020

보통의 날들

평범하게 살기 싫었는데 평범하게 살기도 힘들다는 것을 깨닫는 요즘이다. 나라는 어렵다는데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는 건 이상하게 부끄럽지가 않다. 입은 간사한게 어제 먹은건 오늘은 죽어도 먹기가 싫다.


사는 게 거기서 거기라는데, 요즘 들어 부쩍 꿈이 작아진다.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고 싶은 것이 없어지는 나날이다. 지금의 내 모습 2020년의 나는 분명 2010년의 '나'와 다른 사람임에 틀림없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매일 반복되는 루틴이 갇힌 삶을 살고 있는 듯하다. 누구도 만나지 않으니까, 더 정확히 말하면 목소리를 나눌 사람이 점점 적어지는 듯하다.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내 목소리를 들을 기회조차 없다는 것을 요즘 깨닫고 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나온 슬픔이 와 기쁨 이가 없는 날이 반복된다. 재미있지도 슬프지도 그렇다고 의미 있지도 않은 날이다. 모두가 힘들다는데 힘듦을 공감하는 감정조차 이제는 남아있지 않은 듯하다.


시간이나 돈만큼이나 감정도 유한한 자원인가 보다.

나이가 들면서 시간이 빨리 가는 건 순간순간에 모두 비슷해 하나의 기억으로 압축되는 것처럼. 나는 분명 오늘을 살았는데 어제를 사는 것과 같이 느껴진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나날. 겉으로 보면 평온해 보일 지언정 결코 그렇지 못하다.


감정이 무뎌진다는 것은 어쩌면 더 이상 상처 받지 않기 위한 방어기제 인지도 모르겠다. 무거운걸 많이 들면 손바닥에 생기는 굳은살처럼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말라고 몸에서 신호를 보내는 듯하다. 그래서 어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웃거나 우는 사람이 안 보인다.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아도 말이다.


안타까운 건 굳은살 때문에 부드러운 건지 딱딱한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나에게 오는 사람들도 조만간 떠날 거라는 건 알기 때문에.


이별이 남기고 간 상처는 혼자 있을 때 느끼는 외로움보다 더 가혹하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다가 집으로 들어갈 때처럼.


멕시코에서는 첫 번째 죽음은 심장이 멈췄을 때

두 번째 죽음은 관에 들어갔을 때

세 번째 죽음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어졌을 때라고 한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할 때마다 기억나는 순간과 말들이 있다. 몇 년이 흘렀어도..


내 머릿속에 아직도 분명한 기억과 그때의 그 사람


그 사람은 죽지 않고 내 머릿속에서 살고 있지만


그 사람 머릿속에 나는 살고있을까?


나를 기억해주는 많은 사람들은 의미가 없다.


내가 기억하는 사람이 나를 기억해주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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