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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Aug 07. 2021

생각의 지도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부모를 선택할 수 없듯이, 내가 태어난 지역과 나라 역시 고를 수가 없다. 어쩌면 한 사람의 인생에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나 자유가 아닐까 싶다. 어디에서 나고 자라며 무엇을 먹었으며, 누구를 만났으며, 학교의 선생님을 잘 만났나에 따라서 한 사람의 인생이 달라진다. 너무도 뻔한 이야기지만, 지역마다 음식의 맛도 다른 만큼 교육방식이나 양육태도가 너무도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국인이라는 묘한 동질성을 느끼면서, 올림픽을 볼 때 상대편 국가를 적대시하고, 태어나서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선수들을 마치 옆집의 이웃보다 더 자주 보고 호감을 표한다. 펄럭이는 태극기를 볼 때면 내가 마치 금메달이라도 따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반대로 경기 성적이 좋지 않으면, 마치 내 자식이나 원수를 대하듯이 불만과 미움의 감정을 나타낸다. 더구나 경기 끝낸 후 선수들의 인터뷰를 보면 서양 선수들과 우리나라 선수들의 태도가 사뭇 다르다.


"우리 국민들의 응원과 관심으로 여기까지 올라오게 되었다."

"국민 여러분들께 힘이 못돼서 죄송합니다. 메달을 못 따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반면,


"최선을 다했지만, 옆의 선수가 너무 잘했다. 후회는 없다."

"이번 올림픽은 나에게 있어 의미 있는 시간이었고,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신기하게도 종목과 선수만 바뀔 뿐 인터뷰 내용은 비슷하다. 마치 누군가가 써준 것처럼 아니면 꼭 저 말을 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책 <생각의 지도>는 동양과 서양의 사고방식의 차이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어렴풋이 알고 있는 내용을 더 확실하게 알게 해 준 책인데, 요약하자면 전체와 맥락을 중시하는 동양과 개인과 자율성을 중시하는 서양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흔히 아는 상식처럼 서양은 개인을 중시하고 동양은 집단을 중시하는 뻔한 이야기가 어떻게 세상을 바꾸고, 또한 내가 살고 있는 지금 현재 대한민국의 삶과 어떠한 관련이 있을까?


가령, 근육통이 있어서 병원에 가면 흔히, 통증의 정도를 숫자로 1~10가지 물어본 후 진통제를 처방하거나 아픈 부위에 주사나 물리치료를 처방한다. 그런데 한의원을 가면 분명 뒷목이 아파서 갔는데도 발에다가 침을 놓는 경우가 있다. 어렸을 적에는 이해를 못했으나, 그때마다 한의사 선생님은 우리 몸은 다 이어져 있고, 순환하기 때문에 특정 부위만 치료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했다. 여드름이 나면 레이저로 지지거나 짜면 되는데, 체질에 맞는 음식으로 바꾸라고 한다든지, 지금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물어본다.


나는 누구일까 하는 질문도 달라진다. 나를 어떻게 설명할까 할 때 회사의 팀장 누구의 가족으로 소개한다면, 서양은 자기의 이름을 말하지 않던가? 누구의 엄마, 아빠 , 딸로 기억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다소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그중 마음에 들었던 표현 중 하나가 바로 '공명'이라는 개념이다. 현악기의 한 줄을 건드리면 공명에 의해 다른 줄이 움직인다. 모든 사건과 물질세계는 공명처럼 서로 영향을 주고 연결되어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따라서 독자적인 개별적인 나의 모습은 생각할 수도 없고, 개성이라는 단어는 번역할 수 없었다. 하늘에서 비가 안 오면 임금이 부도덕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이없는 미신이 아니라,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고방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가? 개개의 모든 사건을 대통령이나 정치인의 문제로 돌리거나, 하나를 보면 열은 안다는 말과 개인의 능력과 인성을 분리하지 않는 사고방식까지 말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아마 가장 동양을 잘 설명해주는 것 같다. 각각의 다름과 특별함은 모난 정에 불과하다. 사회생활을 잘하려면, 불합리한 일에 딴지를 걸고, 불평을 하는 사람보다, 묵묵히 잘 들어주는 사람이 평가가 좋지 않은가? 말이 많거나 논쟁을 하려고 하면, 똑똑하다는 평가보다 버릇이 없다는 비난을 주로 얻게 된다. 바로 여기서 문제점이 나온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 3국은 논쟁과 토론을 즐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누구의 말이 맞냐 틀리냐 보다 전체의 조화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싸움이 발생하면 끝까지 논쟁보다는 적당한 제삼자를 통해서 중재하기를 원한다. 마치 아이들 싸움에 선생님이 나타나서 무조건 화해라고 악수를 시키는 것처럼 누가 먼저 시비를 걸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반면, 듣는 사람보다 말하는 사람의 입장이 우선인 서양은 논쟁과 토론이 발달했으며, 듣는 이의 기분보다는 옳냐 그르냐, 맞냐 틀리냐의 싸움의 진위가 중요했다. 설령 상사나 사장이라 해도, 자기의 의견을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몇 년 전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할 기회를 주었을 때, 한국 기자들은 끝내 손을 올리지 못했다. 영어가 서툴러서 창피함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튀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학교에서도 나타난다. 토론 수업과 발표 수업을 할 시 저학년 때는 활발하고 눈치 보지 않은 아이들이 똑같은 아이가 맞나 싶나 의심할 정도로 6학년이 되면 절대 발표를 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애들이 잘난척한다고 재수 없다고 해서 할 수가 없다고 했다. 이러한 현장 분위기를 모르고, 무턱대도 토론 수업을 준비했다가는 망하기 십상이다.


타고난 기질보다, 주변의 환경과 교육의 영향이 얼마나 중요한 지 보여준다. 상대방의 기분을 헤아리며 말하는 것과 사회생활을 잘하는 것은 분명 중요하나, 내가 없어지는 문제점이 있다. 그래서인지 일본과 한국 아이들은 서양 아이들보다 자존감이 낮다. 심지어 일본에는 자존감이라는 용어가 없어서 셀프 이스팀이라고 쓰고 있다. 전체와 집단을 중시하는 문화에서는 개인의 존재 자체는 오로지 공동체에 소명과 책임을 다할 때만 의미가 있다. 개인의 성취감과 성과가 자뭇 공동체를 와해할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다면 겸손해야 하며 그럴 수 없다면 그러는 척을 해야 한다.


메달을 따고도 신나게 포효해서도 안되고, 승진이나 취업을 해도 그렇지 못한 이들을 생각해서라도 너무 크게 기뻐하면 안 된다.


필자는 이러한 사고방식의 차이를 동양은 농경국가 서양의 정신문화 뿌리인 그리스는 무역국가라는 경제구조에서 찾는다.

농경중심 사회에서는 협동과 공동체가 무엇보다 절대적이었으며, 나와 다른 삶의 사는 누군가를 만날 기회가 적었다. 반면 상업국 가는 이 나라 저 나라 다니면서 나와 다른 이가 많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경험으로 알았으며, 일 또한 대규모 농작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협동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스인들에게는 바다 건너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자연스럽게 싹트였고, 이는 세상의 본질과 원리를 깨닫는 것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반면 중국에서는 자연과 사물의 특정 대상의 호기심보다는 나와 어떤 관련이 있으며 실용성이 중시했다. 중국에서 화약과 나침반이 먼저 나왔지만, 그렇게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반면 서양은 사물의 개별적인 특징에 집중하고 탐구하는 특유의 호기심으로 놀라울만한 과학적 성과를 이루어 내지 않았던가?


분명, 서양과 동양의 사고방식은 장단점이 있다. 이분법적 사고하는 서양의 사고방식과 모든 것을 맥락 안에서 사고하려는 동양의 사고방식은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자존감과 행복을 중시하는 게 어떤 게 더 가까운지는 깊이 생각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내가 살아온 환경과 나라를 내가 선택할 수 없고,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면, 모든 것이 집단의 목표와 조화가 중요하다면, 굳이 내가 세상에 나온 이유가 없지 않을까? 나랑 비슷하게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과 행동이 다른 누군가의 눈초리와 불편함 때문에 주저한다면, 돈을 벌어서 무얼 한단 말인가?


묘하게 한국 식당들은 칸막이와 룸이 있는 식당이 많은 반면, 서양 식당들은 오픈된 공간이 많은 게 보인다면, 아마 우리는 자유를 사기 위해 공간을 찾는 것이 아닐까?


내가 중요하고 소중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인생에 관심이 없다. 금메달을 따건 노메달을 따건 말이다.


자기 인생이 재미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 인생을 살고 있는  아닐까?


다른 사람의 시선이 두려워 주저하는 내 모습이 보인다면 무인도를 가야만 할까? 아니면 행복은 혼자 사는것이 아니라 내 가족과 이웃이 함께 어울리는 것일까?


1인가구가 많아지고, 출산율이 떨어지는 작금의 상황이 경제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부모님 세대가 더 먹고살기는 힘들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보여준다. 개인으로 가고 있다면 어째서 우리는 아직도 그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고, 눈치를 보게 될까?


농경국가도 아니고, 그렇게 협동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저자는 여기까지 설명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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