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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Jul 14. 2021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까? #존엄사

미 비포 유 (me before you) 영화 감상#안락사 #존엄사

의자에서 일어설 때, 아니 침대에서 일어날 때 매일 같이 하는 말.. 아이고아이고 죽겠네.. 죽겠다는 말은 참으로 쉽게 나온다. 인생은 그렇듯 인스타 피드처럼 화려하지 않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어쩌면 행복은 짧은 순간이 아닐까? 살면 살아갈수록 의미는커녕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 많아진다면, 사는 게 무슨 낙이나 재미가 있을까?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어디 나뿐이겠는가? 심지어 몸도 안 좋고 경제적인 사정이 곤란한 처지에 있다면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더 힘들다는 말이 절로 나오기 마련이다. 요즘 같은 코로나 시국엔 더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꾸역꾸역 목숨을 이어가는 이유는 죽음 다음의 세상이 무섭기 때문이 아닐까? 원래 모르는 게 제일 무섭고, 또한 모를 때 가장 용감해지는 게 사람이 아니던가? 21세기 첨단 과학기술의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인류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숙제가 죽음이 아닐까?


그런 화두를 담고 있는 영화가 바로


"미 비포 유"라는 영화다. 간단하게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모든 걸 다 가진 꽃미남 재벌남이 불의의 사고로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게 되는 가운데, 가난하고 천진난만한 여자 주인공을 만나 새로운 희망을 가진다는 이야기. 이 뻔하디 뻔한 희망 타령 영화에 한 가지가 특별한 게 있다. 그 남자 주인공은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세상을 떠나려고 한다. 그것도 자신 스스로의 선택과 결정으로 말이다.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은 남겨두고 떠날 수가 있을까? 그것도 병도 아니고 사고도 아닌 스스로의 결정 일종의 자살이라 할 수 있는 "존엄사"로 말이다.


단순히 존엄사를 떠올릴 때 그 어렵고 깊은 단어를 충분하게 공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과 다르게 멀쩡한 두 다리를 가지고 있고, 내일이 오기 싫을 정도의 고통을 겪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 같은 것 따위가 존엄사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무슨 자격이 있나 싶기도 하다. 단순히 책에서 배운 활자 몇 개를 이어 붙이면서 자신의 의견인 마냥, 떠들어 대는 게 부끄럽고 미안하다. 공감과 경험이 없는 글은 누구나 읽어도 거짓말이라는 게 탄로 나기 마련. 그래서 조금 다른 생각을 해보았다.


죽음을 선택한다면? 어떤 뜻일까? 사는 게 편하고 재미만 있었던 시기는 정확하게 20살 대학생 1학년 때 빼고 없었던 것 같다. 10대 20대는 항상 미래가 불안했다면 지금은 그저 제발 오늘 하루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나기를 소시민이 되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나 혼자 산다'에 나오는 기안 84는 태어난 김에 산다고 하는데, 그저 예능의 자막으로 치부하기에는 깊은 철학이 숨겨있는 듯하다.


맞다.. 태어남. 생명. 이런 거 거창하고 그런 거에 우리는 의미를 부여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사람의 탄생의 원인이 사랑이 아닐 수 있다. 누군가의 불장난 혹은 실수 일지도. 모두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하지만 누구나 사랑을 똑같이 받고 자라지는 않는다. 타고난 능력 외모 재산 가진 것에 의해 끊임없이 비교를 당하고 타인의 인정과 관심을 받기 위해 투쟁하는 게 인생이 아니던가? 승부차기의 골키퍼와 키커처럼 둘 중 하나는 패자가 되기 마련이다.


잘 나가는 연예인이 어느새 인기가 뚝 떨어지듯이 인생이 마냥 행복하지는 않다. 그럴 때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면? 죽음 또한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아파서 하루하루 연명하기가 힘든 환자와 앞날이 보이지 않는 신체만 건강한 청춘이 있다면 그들은 같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둘 다 행복하지 않고 사랑받지도 않는 다면 존재의 이유가 없는데, 태어난 김에 그저 억지로 살라고 하는 건 폭력이 아닐까?  


영화에서는 건강한 신체 빼고 모든 걸 다 가진 남자 주인공은 솔직히 남은 여생을 살아갈 수 있다. 일으켜주고 옷을 입혀주고, 심지어 바람을 쐬고 영화를 같이 볼 사람들이 주위에 있으니깐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한다. 파리 시내에서 여유롭게 에스프레소와 딸기와 버터를 듬뿍 바른 크루아상을 먹고 싶지만, 휠체어를 탄 몸으로는 하기 싫다고 말한다. 현재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 한 그는 살아도 그저 하루를 지워내고 있는 것 같다. 아이러니한 건 그는 죽음 선택하지만, 그의 연인에게는 당당히 자신감을 가지고 사는 법을 가르쳐준다. 빨간드레스를 칭찬하고 심지어 새로운 삶을 시작 할 수 있는 유산도....


아마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멋진 모습으로 기억하기를 바랐을까? 아니면 자신의 못 다 이룬 꿈을 그녀가 이루어주기를 바랐을까? 그렇게 그는 자신을 사랑한다면 같이 스위스로 가 달라는 말과 함께..


죽는 모습을 가족과 연인에게 보여주기를 원한다.


그렇게 주인공은 자신이 생명과 몸을 스스로 선택한다. 그의 선택이 온전히 강압과 부적절한 절차가 아니라 본인의 자유의지라서 그를 비판할 수는 없다. 나에게 피해를 주거나 하지는 않으니깐 말이다. 하지만 정부와 종교단체 혹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그를 반대할 수도 있다. 그들은 악용되는 사례를 이야기하면서 공동체에 줄 수 있는 부정적인 영향력에 대해 말할 것이다. 생명은 신께서 주신 선물이고, 개인의 소유라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고, 정부는 사회 전체가 극단적인 생각에 빠져 혹시나 공동체가 와해될 소지가 있는 불편한 개인의 자유를 감추려고 할 것이다. 죽음은 유쾌하지 않고, 소비로도 이어지지 않으며, 세금도 안 내니까 말이다.


조국의 영광과 사명이 나의 탄생의 원인이 아니듯이, 혹은 신께서 나의 몸을 허락하셨듯이, 혹은 내 존재의 원인이 행복이듯이 사람마다 존재의 원인이 다르다면, 그건 답이 하나가 아니라는 뜻이다.


옳다 그르다. 찬성과 반대는 의미가 없다. 이해관계도 아니고 지금 그 상황이 아니니깐 먼 산 불구경하듯이 이야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다만 내 삶의 주인이 나라고 생각한다면 삶의 연장 하든 중단하든 그것 또한 나의 온전한 결정이자 선택이 되어야 할 것이다. 결코 타인을 위해 나를 죽이는 일은 없도록 말이다.




종신 보험 그래서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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