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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개구리 Sep 09. 2019

슬리퍼를 신고 백팩을 메고

나는 누구인가

느지막하게 일어나서 샤워를 한다. 어젯밤, 아니 오늘 새벽까지 뭘 했는지 결과물은 없지만 나는 그때까지 잠을 이루지 않았다. 새벽 5시가 되고 날이 밝을 때쯤 잠들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서 빨래 건조대에 걸려있던 티셔츠를 입는다. 탈수되면서 구겨진 흔적이 남아있지만, “좀 입고 있다 보면 금세 펴지겠지.”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는다.  그리고 백팩에 이것저것을 집어넣는다  렙탑, 아이패드, 마우스 애플 팬슬, 충전 케이블, 혹시 읽을지도 모르는 책까지 모두 가방에 넣으면 안심이 된다.


집을 나선다. 얼마 전 리모델링이 완료된 카페로 향한다. 길을 걷다 쇼윈도에 비친 오후 2시의 내 모습은 누가 봐도 백수 같은 모습이다.

부정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무슨 일 하세요?"라는 질문에 나는 요즘은 이렇게 대답한다.

"뭐 이것저것 하고 있어요~! 음... 뭐... 논다고 봐야죠!"


굳이 어떻게 설명할 게 없다. 굳이 멋지게 근사하게 포장해서 소개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이것저것 한다고 하는 게 맞다.

글을 쓴다. 그림을 그린다. 웹툰을 그린다. 자전거를 탄다. 생각한다.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콘텐츠를 생산한다. 무엇을 할지 생각한다. 무슨 생각을 할지 생각한다. 먹고살 궁리를 한다. 편하게 돈 벌일을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종합 예술 백수” 정도의 호칭이 적당할까?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혹시나 나를 무시하는 저 사람이 과연 나보다 나은 존재인가?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 도 있고,

보통은 내 생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정신승리는 늘 이렇게 시작한다.


사실 우리의 삶이 멋지고 근사해 보이는 면이 정말 한 끗 차이 같다. 회사를 다닐 때는 어디에 다녀요. 어떤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어요.라는 식으로 답변을 하면 모든 게 끝난다.

보통은 자신이 아는 회사(대기업)이면 회사 이름으로 끝나지만, 모르는 회사(중소기업 등)의 이름을 들으면 대충 그냥 넘어가거나, "넌 그럼 거기서 뭐하는데?"라는 질문이 다시 날아오기도 한다.

그럼 "응~ 거기서 디자인 업무를 하다가 지금은 마케팅 쪽으로 빠졌어"라는 등의 답변을 내놓았었다. 그럼 답변은 끝난다.


거기서 끝난다.

질문이 끝난다.

상대방의 질문도 끝나고 나 자신에게 하는 질문도 끝난다. 아니 애초에 나 자신에게 질문을 해본 적이 언제인가?

소위 안정된 직장이라는 곳에 들어서면 나 자신에게도 질문할 이유가 없어진다. 나는 어떤 회사를 다니고 있고 그곳에서 매달 월급을 받고 있으니 그걸로 됐다. 회사의 명함은 나를 설명해주니까.

회사를 나오고 나서는 말이 많아진다. 나도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기가 너무 장황하기 때문이다. 소위 프리랜서라는 좋은 말이 있지만 뭔가 와 닿지 않는다. 그야말로 이것저것 하고 있다 라고 하는 게 적당하게 느껴진다


끝으로 인상 깊게 읽은 책의 구절로 글을 마무리한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쿠퍼 부인으로 이 시의 시장 아내입니다.

나는 너의 이름이나 남편에 대해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사랑하는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네가 누구의 엄마냐고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초등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나는 너의 직업을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기독교인이며, 남편을 잘 내조했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나는 너의 종교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았는지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 [류시화] 중에서>



그럼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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