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열두 가지 재주에 저녁 거리가 없다

Twelve Skills, Yet No Food for Dinner

by 윤본

여러 가지를 조금씩 할 줄 알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해 생계가 불안정한 사람을 빗댄 말입니다. 오래전 돌아가셨지만 제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사실 아버지는 이 속담과는 아주 정반대의 사람이었습니다. 어쩔수 없이 다양한 분야를 겪어야 했던 인생과 함께 어떤 일이든 맡으면 탁월하게 해내왔던 능력으로 가족의 '저녁 거리'가 부족하지 않게 넉넉히 채워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무엇이든 부탁하기만 하면 요술 방망이 마냥 뚝딱 해결해주는 참 신기한 분이셨습니다. 삐걱거리는 경첩이나, 망가진 전자제품도 아버지 손만 거치면 다시 멀쩡히 살아온게 한두번이 아니었죠.


아버지는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시절 할머니 할아버지는 장남을 대학에 보내느라, 차남이셨던 아버지는 결국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하셨죠. 그래도 아버지는 어린 시절에 공부를 꽤나 하셨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매우 영민하셨고 또 손이 빠르고 정확하셨던 걸로 기억을 합니다.


남자로서, 그리고 저도 이제는 한 가정을 지키는 가장으로서 가장 신기한 것은 아버지께서 겪어온 직업이 꽤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다양하다 못해 너무도 스펙트럼이 다른 직업들이어서 그 도전이 신기하고 또 살아낸 인생이 대단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전라북도 임실군의 오수라는 곳입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던 '오수의 개'로 유명한 지역이죠. 아버지의 첫 직장인지는 모르지만 그 곳에서 아버지는 '제사공장'이라고 불리는 회사에 다니셨습니다. 아빠는 무슨 일을 하냐고 물었을 때 모두들 '제사공장을 다닌다'고 하셔서 그말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지만 '제사공장' 네글자만은 제 머릿속에 깊이 각인이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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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사양 산업이 된지 오래된 제사업은 말그대로 누에로부터 실을 뽑아내 생산하던 그시절의 섬유 산업이었습니다. 뽕나무를 길러 그 잎에 누에를 치고, 그 누에를 길러 실을 뽑아내는 그런 공장이죠. 공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우리 집이 있었고 집에는 회사에서 가져온 번데기가 늘 넘쳐났습니다. 이웃들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가족이 먹기도 하고 그랬죠. 아내와 아이들은 번데기는 쳐다 보지도 못하지만 저는 어린 시절 덕에 지금도 번데기를 거부감없이 잘 먹습니다.


후에 전주로 이사와서도 아버지는 오수 제사공장으로 출퇴근을 하셨으니 꽤 오래 그 회사를 다니셨습니다. 결국 회사가 부도가 나고 살던 집에 차압딱지가 붙고 가족이 도망치듯 광주로 간 게 초등학교 4학년 즈음이었으니, 제가 태어난 후로도 10여년을 아버지는 같은 직장을 다녔던 셈입니다. 명절이면 집으로 배달되어 오던 선물 상자며 과일 박스에는 아버지 이름과 함께 전무이사 같은 묵직한 타이틀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회사의 등기이사로 젊은 나이에 꽤나 성공을 하셨던 셈이지요. 그러나 그 덕에 더 많은 빚도 안게 되셨죠.

그러나 이런 저런 좋은 세월도 뒤로하고 빚을 잔뜩 진 채 광주로 내려온 다섯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아버지는 해본적 없는 새로운 도전을 하시게 됩니다. 학교에서 가정 통신문을 적으라 할 때면 아버지 직업란에 뭐라고 써야할지 몰라 물어보면 늘 '소방설비업'이라고 적으라고 하셨습니다. 제사업에서 소방업이라니. 제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고 엄두도 못 내는 그런 업종 전환이었던 셈이죠. 지금 보다는 업의 경계가 조금은 유연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런 식의 직업의 전환은 제게는 지금도 "이게 가능해?" 입니다.


아버지는 새로운 사업에서도 꽤나 유능하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처음에는 작은 아버지 회사일을 도우러 직원으로 출근을 하시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직접 간판을 내건 사무실을 광주 대인동에 개업하시게 됩니다. 직원들도 여러 명 두면서 이런 저런 공사도 수주하면서 사업을 꽤 건실하게 운영하셨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주변에는 사람이 늘 많았고 아버지 또한 새로운 업을 즐기는 듯 보였습니다.


가족들은 전주에서나 광주에서나 생활할 때 불편함은 전혀 없었습니다. 부모님 속이야 잘 모르겠지만, 자식들은 필요한 것을 다 가질 수 있었고 하고 싶은 것도 하면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도 구두쇠처럼 사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적당히 좋은 승용차도 타고 다니셨고, 지방이긴 해도 꽤 넓은 아파트에 살기도 했었죠. 후에 철이 들면서 그 와중에 전주에서 생긴 빚을 지속적으로 갚고 계셨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는 같은 남자로서 참 대단하다라는 말밖엔 다른 말을 할수 없었습니다. 은행 빚도 갚아야 했었고 새로운 사업도 잘 운영해야 했었고 무엇보다 토끼같은 가족들에 챙겨야 할 다른 형제들까지, 저라면 엄두도 못 할 일을 한두개도 아니고 척척 해오신 셈이죠.


나중에 아버지는 건축업으로까지 사업을 늘려나갔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상가건물이나 빌라건물 등을 지어서 분양을 하는 전형적인 소규모 분양 산업이었죠. 말하자면 부업 비슷하게 하신 것 같습니다. 원래는 분양 목적이었겠지만 전담대학교 후문 쪽에 지은 한 상가 건물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저희 가족이 몇 해 살기도 했습니다.


제사업에서 소방설비업, 그리고 건축업까지, 아버지의 커리어 여정은 도무지 제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커리어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새로운 직업으로 매번 도전하면서도 아버지는 결코 '저녁 거리'가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매번 깊이 있는 능력을 발휘하며 가족을 부족함 없이 건사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사뭇 다른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에서 12년을 일을 했습니다. 다시 옮긴 두 번째 직장에서 6년, 그리고 그다음 직장에서 다시 6년. 아버지의 변화무쌍한 인생 역정하고는 달리 조금은 밋밋한 인생을 살아온 셈이죠. 게다가 저는 아버지처럼 손재주가 있지도 않습니다. 집안의 전구를 교체하거나 고장난 보일러를 손보는 것 역시 모두 아내의 몫이었죠.


요즘 직장에서 50을 넘긴 직원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열두 가지 재주는 없었지만 세월 모르고 살다 보니 어느덧 이제 가족의 저녁거리가 걱정이 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주로 사업을 하셨던 분이고 저는 회사에서 월급을 받으며 살아왔던 사람이라 다를 수 있겠지만, 그 시절 아버지의 도전과 패기가 사뭇 대단하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사업 유무를 떠나 무언가 내 브랜드를 가지고 일을 해야 하는 시기가 성큼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주 따듯한 온실은 아니었지만 따박따박 통장에 꽂히는 월급에 그동안 다섯 가족이 오손도손 잘 지내왔습니다. 최근 이직을 준비하다 보니 생각보다 차가운 바깥의 찬바람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변화의 결심과 준비가 생각보다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 시절의 아버지를 생각해 봅니다. 감당이 되지도 않을 수억의 빚을 지고 광주로 쫒겨 갈 때의 아버지. 계획이 있거나 준비가 되어 있지도 않았을 텐데, 무작정 새로운 일을 시작했던 그 용기를 상상해 봅니다. 철없이 징징대는 초등학생 세 아이를 데리고 또 걱정가득한 아내를 데리고 그는 광주로 가는 차안에서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또 만일 지금 제 옆에 계신다면 이런 고민을 하는 제게 어떤 조언을 하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그냥 뭐든 하라며 하다보면 익숙해지고 또 잘하게 될거라며 어깨를 툭툭 치셨을 것 같습니다.


정말 아버지에게 별난 재주가 있으셨을까요? 제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당신도 그냥 앞에 닥친 일들을 열심히 하시다 살아진 건 아니었을까요? 한가지든 열두가지든 무슨 일을 하던 진심과 도전이 어우러지면 저녁 거리정도는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것 저것 재고 고민하기보다는 쫄지 말고 한번 더 실행하는 용기가 필요하겠어요. 제 아버지처럼요.



This essay, titled "Twelve Skills, Yet No Food for Dinner," reflects on a Korean proverb suggesting that having many talents but mastering none leads to instability. However, the author challenges this notion through the inspiring story of their father.


The narrative follows the father's remarkable career trajectory—from managing a silk factory in rural Osu to establishing businesses in fire safety equipment and construction after financial hardship. Despite lacking formal higher education, the father demonstrated extraordinary adaptability and competence across vastly different industries.


Central to the essay is the contrast between the father's dynamic career path and the author's more conventional professional journey. While the father boldly transitioned between unrelated fields, the author has followed a traditional corporate career, staying with each company for years. Now approaching their fifties, the author confronts employment challenges and contemplates entrepreneurship.


The essay poignantly reconstructs moments of crisis, particularly when the family fled to Gwangju after business failure. The author wonders about their father's thoughts during this difficult time—traveling with three young children and a worried wife, carrying enormous debt yet somehow finding the courage to start anew.


The author concludes with a powerful realization that contradicts the proverb's warning. Their father's diverse skills and resourcefulness ensured the family never lacked for essentials, suggesting that versatility combined with determination can indeed provide stability. The essay closes with the author drawing inspiration from their father's courage as they face their own career trans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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