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말이 씨가 되다

by 윤본
스크린샷 2025-11-09 오후 4.14.02.png Words become seeds


몇 달 전 갑작스러운 구조조정으로 실직의 아픔을 견뎌야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열심히 구직활동을 하고 있었죠. 그러나 적은 나이가 아니었기에 예전처럼 면접을 보자는 회사도 많지 않았고, 눈을 넓혀 한국의 포지션까지 알아보았지만 역시 녹록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가능하다면 싱가포르에서 일을 하는 것이 제 큰 바람이었죠.


지원한 회사들의 연락이 뜸하던 시절, 한 회사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바로 3년 전에 최종 입사 직전까지 갔던 회사의 채용담당자 마크였습니다. 당시 인터뷰를 모두 통과하고 마지막 오퍼를 받기 직전, 갑자기 채용계획이 취소되었다며 황당하기 그지없던 경험을 안겨주었던 회사였습니다. 나중에 이 포지션이 다시 오픈되면 꼭 먼저 연락을 하겠다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와 함께요.


과거의 기억 때문에 평소 같았다면 그냥 거절했을 텐데, 당시 좋은 상황이 아니었던 저는 마크의 연락이 너무 반가웠습니다. 사실 정말 귀한 싱가포르 포지션이어서 믿고 해보는 수밖에 없었기도 했죠. 그래도 예전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이어링 매니저와의 첫 번째 인터뷰를 잡는 데까지 한 달이 넘게 걸렸습니다. 그리고 이후 진행되는 후속 절차들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습니다. 다른 회사에 지원했을 때는 보통 1주 전후로 다음 인터뷰들이 잡혔었고, 평균 4, 5번 인터뷰를 진행하더라도 두세 달 정도면 모든 프로세스가 마무리되곤 했었으니까요.


그러나 이 회사는 길면 한 달, 짧아도 2, 3주 정도의 간격으로 인터뷰가 진행되었고, 시작부터 최종 오퍼까지 걸린 시간을 감안하면 거의 5개월 가까이 걸린 것 같습니다. 한 회사만 믿고 있을 수는 없어 중간에 다른 회사들에도 지원을 하고 또 고배를 마시고를 반복하곤 했던, 마음 불편했던 나날이었죠.


몸도 마음도 지쳤었습니다. 싱가포르는 기존 취업비자가 만료된 후 재취업을 하지 못하면 근로자는 기간 내에 출국을 해야 합니다. 당사자에게는 매우 가혹한 정책이죠. 아내와 아이들은 미리 보호자 비자와 학생비자로 변경해 놓았기 때문에 큰 걱정은 없었지만, 저는 별다른 수가 없었습니다.


진행 상황을 물어볼 때마다 회사는 거의 마무리되었다며 곧 오퍼레터를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싱가포르를 떠나야 하는 날은 점점 다가왔습니다. 초조하고 속상한 마음에 한국에 있는 누나랑 잠시 통화를 하였습니다. 당시 누나는 유일하게 제 상황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이었거든요. 또 한국에 가게 되면 어머니 댁으로 가야 했었고, 걱정하실 것도 당연해서 이런저런 많은 고민이 있기도 했습니다.


"어때? 지원한 회사들은 좀 잘 진행되고 있니?"

"흠, 한국은 몇 개 진행 중이 있는데, 싱가포르 포지션 진행이 너무 더뎌서 걱정이야."

"그렇구나. 그럼 우선 한국에는 나와야 하는 거네? 엄마 집으로 갈 거지?"

"응. 그런데 엄마한테 뭐라고 말할지 걱정이야."

"난 그래도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엄마도 아실 건 아셔야지."

"그냥 비자 때문에 잠시 한국 나왔다고 둘러댈까?"

"아니야, 그건 아닌 것 같아. 그냥 솔직히 말하고 거기서 또 열심히 면접 보러 다녀."


어머니가 아시는 것이 무척 부담스러웠던 저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통화를 끊었고, 지켜보던 아내가 옆에서 한마디 건넵니다.


"여보, 근데 정말 말이 씨가 되는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아니, 오퍼는 곧 준다고 했으니 당신 말한 대로 비자만 기다리다 올 수도 있지."

"휴,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

"그냥 마음 편하게 어머님하고 명절 보낸다고 생각하고 가요.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없잖아."


시간이 흘렀고 결국 저는 아무것도 받지 못한 채 귀국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들떴던, 10일 가까이 되는 황금 연휴였지만 광주로 향하는 길이 내내 편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도 대충 소식을 전해 들었는지 특별한 내색이 없으셨죠.


10시간이 넘는 여정에 몸은 피곤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저는 아버지 산소를 먼저 찾았습니다. 마음은 계속 불편했지만, 꽃바구니와 술을 챙겨 들고 산소에 가는 길은 생각보다 상쾌했습니다. 버스 차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도, 예쁘게 가꾸어진 공원묘지의 나무들도, 막 단풍이 시작되는지 색색이 예뻐 보였죠. 게다가 선선한 가을바람은 헛헛했던 제 마음도 기분 좋게 만들어주고 있었습니다.


술을 한 잔 따라 드리고 가만히 앉아 가을 날씨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띠링 하며 알림음이 울립니다. 다름 아닌 마크의 메시지였죠.


"The offer is approved and we can send it over to you"


이게 무슨 조화입니까? 아버지께 속으로 빌었던 게 정말 효험이 있었을까요? 말이 씨가 되는 거 아니냐며 무심코 아내가 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오퍼를 받고 나면 신원조회와 비자 프로세싱을 진행할 것이라며 조금 시간이 걸릴 거라고 마크는 친절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정말 아내의 말대로 된 것이었어요. 물론 비자를 기다리는 일도, 신원조회를 기다리는 일도 지루하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모든 것이 처리되고 싱가포르로부터 입국해도 좋다는 메일을 받았을 때는 정말 날아갈 듯이 기뻤습니다.


저는 지금 싱가포르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에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3년 전에 마크가 했던 말도 저는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시 제게 좋은 기회로 돌아왔고, 힘내라며 아내가 해주었던 말도 결국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속담은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에게 말조심하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속담입니다. 하지만 그냥 의례히 하는 말이나, 위로의 말들도 어떨 때는 이렇게 정말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Words become seeds" is a Korean proverb traditionally warning people to watch their speech, as negative words might come true.


This essay transforms that cautionary meaning into hope. After losing his job in Singapore, the author faces visa expiration and must return to Korea empty-handed. His wife casually suggests, "Maybe you're just waiting for the visa, as you said"—a throwaway comment that becomes reality. At his father's grave during Chuseok, the long-awaited job offer finally arrives.

Through this personal journey, the author discovers that sometimes encouraging words and seemingly empty promises can manifest into truth, reminding us that language holds power in unexpected w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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