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객지 벗도 사귈 탓이다

by 윤본
스크린샷 2025-11-23 오후 5.56.53.png Friendships, even in faraway places, are what you make of them


타향에서 사귄 친구라도 정을 나누기 나름이며, 친한 정도에 따라서는 형제처럼 가깝게 지낼 수 있다는 뜻의 속담입니다. 많이 들어보거나 익숙한 속담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만큼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태생이 그렇게 사교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요즘 유행하는 MBTI로 보자면 E(Extroverted) 성향의 사람이 아닌 I(Introvert) 성향이 매우 강한 편이죠. 그래서 그런지 의욕적으로 친구들을 사귀는 편은 아니었지만 세상을 살다 보니 제법 가까운 친구들도 많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런 소중한 친구들 중 이곳 싱가포르에서 매우 가까워진 한 친구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말 그대로 속담에서 말하는 객지에서 만난 친구인 셈이죠.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습니다. 싱가포르로 가기로 결정이 된 후, 이무리 저무리 친구들과 송별회 비슷한 것들을 하던 때였죠. 어느 날 한번은 전 직장 동료들과 함께 감자탕집에 모여 겸사겸사 서로 안부를 물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친구가 대뜸 말을 꺼냅니다.


"맞다 싱가포르에 지금 J가 살고 있잖아. 연락 한번 해봐. 그래도 같이 회사 다녔는데,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

"에이 무슨, 됐어 임마. 그냥 가서 좀 적응하고 만나면 되지. 가기 전부터 뭘 민폐를 끼치냐."


몇번 일을 함께 하긴 했지만 가깝게 지냈던 이는 아니었어서 전화하겠다는 친구를 극구 말렸습니다. 술 한잔 먹고 조금만 친해졌다 하면 형님 동생 하던 그런 시절에도, J와는 서로 존칭을 하던 사이였어서, 내심 편하지는 않았거든요.

그러나 장난기가 발동한 친구는 끝끝내 싱가포르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이 J야 어떻게 잘 지내냐? 우리 여기 다 모여서 소주 한잔 하고 있다. 이거 스피커폰이야. 인사 좀 해."

"아유 형님들 잘 지내고 계세요?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하하 그래. 그런데 이번에 우리 친구 OO이 싱가포르로 가게 됐어. 네가 거기 있으니 좀 도와주고 친하게 지내."


"J 씨 잘 지내셨어요? 하하 이렇게 인사드리게 되네요. 제가 어쩌다 보니 이번에 싱가포르로 가게 되었습니다."

"아이고 형님, 그러셨어요? 정말 축하드려요!"


부담스럽고 갑작스러운 전화에도 J는 반갑게 인사를 해주었고, 언제 도착하냐며, 호텔은 어디냐며 따로 메시지를 보내 꼭 연락 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죠. 미안함 반 불편함 반, 그것이 우리 관계의 시작이었습니다.


싱가포르로 건너온 후, J와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어색했던 말도 놓게 되었고, 그의 도움 덕에 생소하기만 한 이곳 생활에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렌트할 집을 구하러 돌아다닐 때도 J는 바쁜 시간을 쪼개 함께해 주었고, 주변 마트나 병원, 그리고 아이들 학교 문제까지도 그는 미안할 정도로 신경을 써주었습니다. 아내도 저도 처음에는 미안함에 마음이 편한 것만은 아니었지만, 그가 도와준 덕에 가족 모두 큰 시행착오 없이 새로운 세상에 잘 적응할 수 있었죠.


친절했던 그의 도움으로 어색했던 관계도 언제 그랬냐는 듯 많이 편해졌습니다. 주말이면 특별한 이유 없이 근처 커피숍에서 만나는 일도 잦았죠. 회사 일들, 아이들 학교 일들, 그리고 다녀왔던 가족 여행 이야기까지, 그리고 가끔은 속내 이야기까지 터놓고 편하게 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회사 일이 좀 일찍 끝나기라도 하는 날엔 저녁 겸 맥주 한잔 하는 적도 많았고, 음식을 준비해 함께 캠핑을 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콘도 앞 수영장에서 술 한잔 기울이는 날들도 종종 있었습니다. 같은 업계에 있어 말이 제법 통하는 것도 한몫 했습니다. 세일즈로 근무를 했던 저와 프리세일즈 업무를 담당했던 J는 회사는 달랐지만 업무상 이해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각자가 겪는 스트레스나 고충들에 진심으로 이해하고 격려해 줄 수 있었죠.


J는 저보다 나이가 세 살 어립니다. 그래서 그런지 항상 깍듯하게 저를 대합니다.


"형님, 출장 건강히 잘 다녀오세요."

"형님, 이럴 때일수록 술은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열심히 하고 계시니 곧 좋은 결과가 있으실 거예요. 힘내십시오."


같이 커온 남자 형제가 없어서 그런가, 이런 문자를 보내는 녀석이 처음에는 참 어색했는데, 어느새 이제는 이런 작은 메시지들이 큰 힘이 되는 것을 느낍니다. 이제는 저도 J에게 오글거리지만 진심 섞인 안부를 종종 전하고 있죠.


돌이켜 보면 마음을 다해 선물을 하고 싶어졌던 사람이 내 가족을 빼고는 있었나 싶습니다. 또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뭐라도 해주고 싶던 마음이 들었던 사람은 또 있었나도 싶습니다. 그렇게 정내미 없이, 건조한 인간관계를 가져가던 제 마음에 어느덧 J는, 챙겨주고 싶고, 잘해주고 싶고, 걱정해주고 싶은 친구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죠.


"얘들아, J 삼촌 선물을 이거 살 건데 어떻게 생각해?"


아이들과 여행 중에 들린 기념품점에서 선물을 고르며 말을 꺼냈습니다. 참 좋은 생각이라며, 열심히 어울리는 컬러를 골라주는 아이들을 보니, 아이들 역시 J 삼촌이 많이 고마운가 봅니다.


J는 어린 시절 초등학교를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가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 다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대학을 마쳤죠. 말 그대로 어린 시절부터 글로벌 인생을 살아온 셈입니다. 싱가포르와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했고, 지금은 가족들과 함께 런던에서 또 다른 챕터를 열어가고 있습니다.


그가 주었던 고마웠던 애정들을 돌려줄 날이 오기를 바라며, 그곳에서의 내 친구 J의 무운을 진심으로 기원해 봅니다. 그리고 예쁘고 착한 제수씨와 귀여운 아이들의 건강과 행복 또한 진심으로 바래 봅니다.



The Korean proverb "객지 벗도 사귈 탓이다" (Gaekji beotdo sagwil tasida) suggests that even friendships formed far from home can become as close as family bonds, depending on how we nurture them.


The author, a self-described introvert, shares the story of J, a former colleague he reconnected with after relocating to Singapore. What began as an awkward phone call arranged by well-meaning friends evolved into a profound brotherhood.


J helped the author's family settle into their new life, from finding housing to navigating schools. Through weekend coffee meetings, camping trips, and heartfelt text messages, their bond deepened beyond typical workplace relationships.


Now with J living in London, the author reflects on how this "객지 벗" (friend from a foreign land) became someone he genuinely cares for and worries about—proving that geography matters less than the effort we invest in relationshi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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