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눈뜨고 코베이다

by 윤본
Stealing one's nose while their eyes are open


"아빠, 뭔가 큰일 난 것 같애. 내가 실수한 것 같은데 어떡하지?"


당황한 목소리로 큰애가 방으로 달려왔습니다. 평소 별로 아빠를 찾을 일이 없는 아이가 잔뜩 긴장해서 다가오니 오히려 제가 더 긴장이 되더군요. 무슨 일이냐며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아무래도 자기가 스캠을 당한 것 같다며 울상을 짓습니다.


싱가포르에 건너온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습니다. 아이 역시 이제 막 새로운 학교에서 친구들을 알아가고 있던 시기여서 더욱 혼란스러워했습니다.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 이건 뭐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었더군요.

같은 반 새로 사귄 친구 번호로 한 메시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친구가 인터넷에서 어떤 물건을 살 게 있는데, 그걸 사려면 아는 사람이 인증 비슷한 것을 해줘야 한다고 했답니다. 그리고 인증하는 데 한 50달러가 든다고도 했구요. 네가 좀 도와주면 내일 학교에서 50달러는 주겠다고도 했답니다. 새로 만난 친구였지만 이상해 보이지 않던, 그저 평범한 친구였어서 큰애는 별 의심하지 않고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30분이 채 지나지도 않아, 승인이 한 번 더 필요하다며 연락이 다시 왔습니다. 이번에도 아까처럼 50달러를 내야 하지만 내일 100달러를 주겠다고도 덧붙였구요. 이번에도 큰애는 큰 의심 없이 도와줬습니다. 그렇게 그 일은 그냥 그 나이 또래 여자아이들이 하는 시시콜콜한 쇼핑 이야기로 지나가는 듯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큰애에게 이런저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나랑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여기 애들은 이런 부탁도 참 스스럼없이 하는구나'

'100달러면 정말 적지 않은 돈인데… 흠…'

'어? 가만있자, 이거 설마 스캠당한 건 아닌가?'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한 아이는 그 친구에게 직접 연락을 해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자기는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없다며 그 친구 역시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친구가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걱정했던 대로 뭔가 큰 사고를 친 것 같은 아이는 그렇게 잔뜩 쫄아서 제 방에 온 것이었습니다.


아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 듣고 저는 부랴부랴 스마트폰 앱을 열어서 사용요금 조회를 해보았습니다. 내심 없기를 바랐던 것과는 달리 문제의 50달러짜리 외부 서비스 구매 내역 두 건이 사용요금에 포함되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저는 한동안 잔소리를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죠.


"다 큰 녀석이 이런 실수를 하면 어떡하냐"

"유튜브에서 보이스 피싱 사고들도 안 보냐? 그런 거 항상 조심해야지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냐고"

"핸드폰에서 돈을 지불하거나 결제하고 이런 건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아빠가 몇 번을 말했냐"


아이에게 일장 연설을 끝내고 저는 핸드폰 통신사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통신사의 잘못은 아니고 명백히 우리의 잘못이었습니다. 그래도 뭔가 도움받을 게 있진 않을까 해서 문의를 해본 것이죠.

사실 당시 이곳 분위기도 한국의 보이스 피싱 사고들처럼 핸드폰으로 인한 스캠 피해가 종종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상담 직원은 진심으로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감사하게도 우리는 아이가 사기당한 요금까지 면제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큰애는 천성이 사람을 잘 믿고 누가 부탁하면 거절을 잘 하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스캠이나 보이스 피싱 같은 것에 절대 속지 않을 사람에게도 감쪽같이 속아 넘어갈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집에서 제일 똑소리 난다는 다름 아닌 바로 아내입니다.


아내가 직장 생활을 하던 때이니 조금 오래전 일입니다. 육아하랴, 회사 일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던 아내에게 어느 날 회사 회의를 하던 중 낯선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고 합니다. 모르는 번호가 찍혀 있었지만 아내는 별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ㅇㅇㅇ 씨 핸드폰이죠?"

"네 그런데요, 누구시죠?"

"네 저는 중앙지검 수사관 ㅇㅇㅇ입니다. 지금 ㅇㅇㅇ 씨가 대포통장 사기 사건에 연루되셔서 연락 드렸습니다"

"네? 뭐라고요? 뭔가 잘못 아신 거 아니에요?"

"우선 ㅇㅇㅇ 씨 명의의 통장이 지금 사건에…"

"아니 제가 지금 급한 회의 중이어서요, 죄송해요. 회의 끝나고 바로 이 번호로 연락을 드릴게요"

"아니, 이게 지금 매우 급…"

"뚝"


실제로 매우 중요한 회의 중에 걸려온 전화였습니다. 아내는 상대방이 말하는 것을 채 다 듣지도 못하고 전화를 끊어야 했죠.


그러나 평생 경찰서도 한 번 가본 적 없던 아내에게 중앙지검 수사관이라니, 게다가 사기 범죄에 연루되었다니, 아내는 이내 겁이 잔뜩 들었습니다. 회의 내내 집중할 수도 없었죠. 하는 둥 마는 둥 회의를 어떻게 마쳤는지도 모른 채 아내는 조용한 곳으로 가 아까 그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습니다.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이오니…"


한껏 긴장해 전화를 걸었지만 허무하게도 없는 번호라며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습니다. 두어 차례 더 해보았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제서야 아내는 이게 보이스 피싱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죠.


매사에 똑 부러지고 흐트러짐이라고는 전혀 없는 아내가 어떻게 이런 걸 못 알아차릴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아내 말로는 당시 수화기 너머로 형사들 대화 소리들까지 들리는 등 너무 감쪽같아서 깜빡 속을 수밖에 없었다고는 합니다.


알면서도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당한다는 이 말은 스캠이 난무하는 요즘 세상에 더 자주 쓰이곤 합니다. 이메일 피싱으로 시작해, 전화를 이용한 보이스 피싱으로 진화한 스캠은 이제는 감쪽같은 AI 영상으로 또 순진한 사람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정말 눈 뜨고 코 베이는 일이 없으려면 항상 정신 바짝 차려야겠습니다.



"Stealing one's nose while their eyes are open" is a Korean proverb describing scams so clever that even vigilant people fall victim.


The author shares two family experiences: their daughter's online shopping scam in Singapore through an impersonated friend's message, and their sharp wife's near-miss with voice phishing during a work meeting.


Both episodes, handled by people who should have known better, illustrate how modern scams—from phishing emails to AI-generated videos—have become so sophisticated that constant vigilance is our only defense in today's digital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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