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사는 것 같이 산다

by 윤본
스크린샷 2025-12-14 오후 7.53.30.png Living Like People Live

어릴 적 우리 집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습니다. 천방지축 세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집이니 어련하겠습니까마는, 제가 생각해도 우리 집은 훨씬 더 시끌벅적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맏이인 누나는 상당히 조용한 편이었지만 연년생으로 태어난 여동생과 저는 하루가 멀다 하고 투닥거리기 일쑤였죠. 혈기왕성하셨던 어머니 역시 이 정신없는 두 녀석을 혼내느라 집 안에는 큰소리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여동생의 꼬드김에 넘어가 저금통을 뜯다 어머니께 곡소리가 나게 혼이 난 적도 있고, 명절이라며 큰맘 먹고 백화점에서 사준 브랜드 외투를 불장난 하다 홀랑 태워먹어서 호되게 꾸지람을 들은 적도 있었습니다. 전주에 살 때로 기억하는데, 어느 날 여동생이 늦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은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동네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찾을 수가 없었고, 시간이 조금 흘러 동생은 천연덕스럽게 집 초인종을 눌렀지만 어머니는 문을 열어주지 않으셨습니다. 게다가 한참 뒤에 들어온 동생에게 쌀 포대자루를 가리키며 들어가라 하셨죠. 꽁꽁 묶어서 밖에 내다 버린다고 하시면서요. 동생은 눈물 콧물 범벅에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어서야 다행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동생은 그때 정말 무서웠는지 아직도 그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물론 어머니는 그런 일 없다고 절대 발뺌하시지만요.


이런 요란벅적한 하루를 보내도 다음 날이 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우리는 작당모의를 하기 일쑤였고, 매일같이 장난꾸러기들을 길들이시느라 어머니도 참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가족들이 함께 먹는 저녁 식사 장면도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얌전한 누나와는 달리 저와 동생은 서로 자기 것만 챙기느라 부모님에게 혼이 나기 일쑤였죠. 어쩌다 식탁에 고기찌개라도 올라오면 큰 덩어리를 서로 가져가려고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 대다, 보다못한 아버지께 알밤도 많이 맞았습니다.


어쩌다 근처 친구 집에 가면 따스한 미소를 지어주시는 친구 엄마가 그리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핑크색 머리띠에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던 친구 여동생도 너무나 사랑스러웠고요. 맨날 길다란 구두 주걱을 들고 하나, 둘, 셋을 외치며 뛰어오는 우리 엄마하고는 수준이 달라 보였고, 오빠한테 반말하며 장난을 치거나 속을 박박 긁어대는 사내애 같던 제 동생과는 너무도 다른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매일 정신없고 시끄러운 우리 집 같지 않아서 그냥 그들이 부러웠던 거죠.


막내 삼촌은 광주에 오실 때면 종종 저희 집에 놀러 오곤 했습니다. 어릴 때 저희와 함께 살았거든요. 그렇게 가끔 우리는 함께 식사도 하면서 저녁 시간을 보내곤 하는데요, 그날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당탕탕 뛰어다니는 아이들이며, 그 뒤로 구두 주걱을 쥐고 쫓아가는 어머니, 밥 먹을 때도 여전히 투닥거리는 모습에, 거기에 잔소리와 꿀밤으로 응징하는 아버지의 모습까지. 그날 저녁, 놀러 오신 삼촌이 기분 좋게 웃으시며 하시던 혼잣말이 이상하게 기억에 남습니다.


"그래 맞아, 내가 여기에만 오면 사람 사는 것 같다니까. 하하하"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고 열심히 직장을 다녔습니다. 세일즈이다 보니 밖에서나 안에서나 사람 만나는 일이 주요 업무였습니다. 고객이나 협력업체를 만나 늦은 밤까지 접대가 이어지는 일도 많았고, 일을 모두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쯤이면 자정이 훨씬 넘은 새벽 시간이 되곤 했었죠. 술이 덜 깬 채로 아침에 일어나 옷을 고쳐 입고 다시 출근을 하는 일이 쳇바퀴처럼 돌아갔습니다. 체중은 늘어갔고 건강은 나빠졌으며 업무 스트레스는 점점 쌓여갔습니다. 하루하루 생활이 너무 피곤하고 싫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습니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었으니까요.


이후에 싱가포르에 와서도, 한국으로 출장을 다닐 때면 하루에 3개씩 잡히는 고객 미팅 때문에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습니다. 원래 해야 하는 평소 업무도 그대로인데, 고객 미팅도 준비하고 미팅 후 팔로우업까지 하려면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죠. 그러다 보니 슬슬 일을 미루는 일이 생겨났고, 급기야는 빠뜨리는 일이 생기기도 하면서 영업적으로 매우 난감한 일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어쩔 수 없이, 바쁘게, 피곤하게, 그리고 정신없이 살던 어느 날 저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부딪치고 맙니다.


바로 갑작스러운 회사의 구조조정이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회사는 어느 정도 위로금도 제 손에 쥐어 주었고, 이런저런 일로 지쳐 있던 터라 '이렇게 된 김에 그냥 조금 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좀 추스른 후에 직장을 잡는 것이 크게 문제 없을 거라 자신했던 거죠. '아빠는 백수가 체질인 것 같다'며 농담을 할 정도로 여유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요.


그런데 예상과는 다르게 쉬는 기간이 늘어갔습니다. 전에는 기껏해야 1~2주 쉬고 다른 곳으로 출근하거나, 한 달 정도 쉬는 게 가장 많이 쉬는 거였는데, 어느덧 세 달이 넘어가니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유행처럼 다른 회사들로 구조조정이 확산되면서 시장에는 젊고 유능한 사람이 넘쳐났습니다. 제가 설 곳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던 거죠. 접대도 없고 야근도 없었지만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무척 피곤했습니다. 하루 종일 시간은 많았지만 더 이상 그것이 여유라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5개월여 시간이 흘러, 현재의 직장에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첫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3박 4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촘촘히 짜인 일정으로 하루 2~3개의 미팅들과 약속들을 소화하느라 매우 바쁘게 시간을 보내게 되었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역시매우 피곤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전과는 달리 돌아오자마자 미팅 팔로우업을 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합니다. 자신의 변화한 모습에 짐짓 흐뭇해져서는 나도 모르게 혼잣말 한마디가 툭 튀어나옵니다.


"그래, 이게 사람 사는 거지! 하하하!"



"Living Like People Live" (사는 것 같이 산다) captures the Korean expression for a life filled with genuine human vitality—chaotic, messy, but deeply alive.


The essay traces the author's journey from a rambunctous childhood home where siblings fought and parents scolded, through grueling corporate years that felt hollow despite constant busyness, to unemployment's unsettling stillness.


When an uncle once laughed at the family's noisy dinners saying, "This is what living like people live looks like," the phrase seemed to celebrate disorder.


Years later, returning to meaningful work after months of anxious idleness, the author finally understands: true living isn't about peace or chaos—it's about purposeful engagement with life's dema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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