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출장으로 서울을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고객을 만나러 마포 방면으로 이동하던 도중 갑작스레 고객사에 급한 일이 생겨 그날 예정된 미팅이 결국 취소되고 말았습니다. 택시로 이동 중이었던 저는 다른 약속을 만들기도 애매해 강변 북로를 좀 더 달려 예정에 없던 합정으로 향했습니다.
합정. 이곳은, 2000년 12월,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을 때 제 보금자리가 있던 곳이었습니다. 지하철로는 합정역 2번 출구였지만 정확한 주소지는 마포구 서교동이죠. 운전하고 다니며 근처를 지나쳐 본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실제로 이렇게 마음먹고 가본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취업을 해 당장 머물 곳이 필요했지만 저도 어머니도 따로 방을 얻을 돈이 없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할머니는, 돌아가신 아버지 몫이라며 시골 논을 팔아 작은 원룸을 구할 수 있는 전세금을 마련해 주셨고 그렇게 할머니의 도움으로 저는 이곳 3평 원룸에서 홀로 서울살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신축 오피스텔도 아니고 흔히 보이는 오래된 붉은 타일의 다가구 주택의 한 원룸이었습니다. 방에 침대와 TV를 넣고 행거를 넣고 발 디딜틈도 없는 작은 원룸이었죠. 이사를 하고 친구들이나 회사 동기들도 한두 번씩 다녀갔습니다. 사실 그이들의 환경에 비하면 많이 보잘것없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지만, 저는 저만의 그 공간이 참 좋았습니다. 내 이름으로 계약이 된 온전히 내 것이라 말할 수 있는 첫 공간이었으니까요.
지금의 아내도 그 즈음 만났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슬퍼하고, 함께 즐거워하고 또 다투며 3년 남짓 연애를 했고, 결국 결혼을 하게 되면서 이곳을 떠나게 되었죠. 당시 갑작스런 출장으로 아내 혼자 이사를 해야 했던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두 번째 보금자리에서 신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당산동의 14평 소형 아파트였습니다. 원래는 큼지막한 원룸형 아파트인데 집안에 가벽을 세워 작은 방을 만든 그런 구조였죠. 작았지만 둘이 신혼 살림을 하기에는 꽤 적당했고, 여의도와 강남 등 출퇴근 하기도 나름 편리한 지역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낡고 비좁았던 기존 원룸에서 벗어난 게 당시 저는 너무 기뻤습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감사하게도 아내는 임신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그곳에서 첫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둘 뿐이었던 가족이 셋이 되는 행복한 순간이었죠. 하지만 아이가 커 갈수록 집이 좁다는 게 점점 느껴졌습니다. 아내와 저는 맞벌이를 하면서 가능한 한 사람 월급은 모두 모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렇게 모은 돈은 늘 전세금을 올리는 데 고스란히 들어갔지만, 정작 우리에게는 조금 더 크고 안정적인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자칫하면 매번 이사를 다닐 수도 있는 상황이 부담스러웠던 우리는 결국 집을 구매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현재 전세금에 그동안 열심히 저축한 돈을 더했고, 그래도 부족한 금액은 대출을 받아 그렇게 우리 명의로 된 첫번째 집을 갖게 되었습니다.
처갓집과 같은 단지 내의 24평 아파트였습니다. 출퇴근은 전보다 조금 불편해 졌지만, 내 집이 주는 안정감은 꽤나 컸습니다. 그리고 처갓집이 가까이 있는 것도 심적으로 큰 안심을 주었죠. 그렇게 이사한 집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둘째가 태어났고, 그 후 3년이 흐른 뒤 다시 셋째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 식구가 처음 살림을 꾸리는 데는 전혀 부족하지 않았던 이 집은 처음 느낌과 달리 점점 좁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의 몸집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커 나갔습니다. 그러던 중 장인어른께서 고마운 제안을 하나 주셨습니다. 최근 처남이 결혼해 독립해 나가면서, 살고 계신 집이 쓸데없이 크다며, 집을 바꿔 사는 게 어떻겠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이들도 이제 자기 방이 있어야 할 나이가 되어 가니 그게 좋겠다며 고맙게도 먼저 말씀을 주셨습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저희는 감사하게도 넓고 쾌적한 곳으로 이사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매달 어느 정도 비용은 드리면서 그렇게 세 번째 보금자리에서 다섯 가족이 살기 시작했습니다. 자꾸 월세를 적게 받으려는 착한 집주인이며, 동시에 우리집을 내 집처럼 아끼며 살아주는 믿을 만한 세입자이기도 하셨던 장인 장모님 덕분에 우리 가족은 한층 더 안정되었습니다. 일종의 월세 집이었지만 아이들은 소원하던 자기 방을 드디어 가질 수 있었고, 저 역시 퇴근하고 돌아오면 편히 앉아 쉴 수 있는 공간이 너무 좋았습니다.
세 아이들이 연달아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아내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하는 저녁이 즐거웠고 이렇듯 가족의 모든 일상이 좀더 행복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휴일이면 함께 캠핑이나 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습니다. 아이들도 친구들을 종종 집으로 데려올 만큼 가족들의 집에 대한 애정은 점점 깊어갔었죠.
그런데 어느날 장인어른께서 집에 잡힌 대출 때문에 좀 골치 아파 하신다는 말을 아내로부터 들었습니다. 혹여나 저희가 살고 있어서 마음대로 처분도 못 하시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어쩌면 이번 기회에 정말 두 집을 바꾸는 것도 서로 나쁘지 않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인어른과 상의를 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많은 생각 끝에 서로 사는 집을 바꿔 매매 계약을 하기로 결정을 하게 되었죠. 장인어른은 골머리 썩던 대출금과 이자를 모두 해결할 수 있었고, 저희 역시 가족 모두가 애정하던 집이 정말로 우리 집이 되서 결국 두 집 모두 만족하는 거래를 한 셈이었습니다.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3평 짜리 원룸에서 시작했지만, 열심히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어쩌면 금전적으로는 그리 큰 결과는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 아래 내 가족들을 누일 집 한 채 있는 것은 제게는 어쩌면 태산보다도 더 큰 의미입니다. 그리고 부부의 역사 속에 하나둘 늘어난 우리 아이들과, 또 그들과 함께한 시간들이 어쩌면 내게는 더욱 크고 소중한 인생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Tikeul moa taesan" (티끌모아 태산) is a beloved Korean proverb meaning "dust gathered becomes a mountain," teaching that small efforts accumulate into great achievements. This essay traces a family's journey from a tiny 3-pyeong studio in Hapjeong to their current home, chronicling not just the expansion of physical space but the growth of love and memories.
Starting with a room bought with money from his late father's rural farmland, the writer moves through cramped newlywed apartments, growing families, and generous in-laws, ultimately acquiring a home through years of patient saving. Yet the true mountain built isn't made of property—it's constructed from three children, countless family dinners, camping trips, and the simple security of having a place to call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