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파란만장

by 윤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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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태어나 처음으로 들었던 할머니의 노래입니다. 아주 오래전 할머니의 칠순 잔치, 사회자에 이끌려 못 이기는 듯 마이크를 잡고 부르셨던 노래, 바로 작자 미상의 노래, 희망가입니다.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로 이어지는 가사는 곡절 많고 사연 많던 당신의 인생을 어쩌면 가장 잘 표현하는 노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후로도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뀔 시간을 더 살아내고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마지막 그녀의 모습을 함께하지 못했지만,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아들들도 알아보지 못하고 조금은 쓸쓸하게 마지막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1920년대에 태어났습니다. 그녀가 종종 '왜정시대'라고 말하곤 했던, 우리가 아는 일제강점기 시절입니다. 전라도의 한 부농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할머니 오빠가 서울에서 큰 회사를 한다더라, 친척 누구는 유명한 변호사더라, 돈을 많이 벌어 큰 부자가 되었다더라, 이런 이야기들을 커가면서 심심치 않게 들은 걸 보면, 그녀의 집안은 실제로 꽤 잘 살았던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둘째 아들인 제 아버지도 할머니 오빠의 회사에 취직해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일구기도 했었죠.


전쟁이 끝나고는 식솔들을 이끌고 그녀는 그녀의 고향으로 갔습니다. 도시로 나오기 전까지 '생골'이라고 불리던 그녀의 고향에서 가족들은 터를 일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설이나 추석이면 친가 쪽 고향뿐 아니라 할머니의 고향, 생골에도 한해도 빠지지 않고 들르곤 했었습니다.

스무 살이 채 되기 전 할아버지에게 시집온 할머니는 전쟁통에 딸 하나를 잃었지만, 그래도 여섯 아들과 딸 하나를 잘 키워 유복한 가정을 꾸렸습니다. 쭈뼛쭈뼛하고 소심한 성격의 남편과는 달리 통도 크고 누구에게나 친절했던 그녀는 모두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집에 오는 모든 이들에게 흔쾌히 음식을 내주었고 돈을 쥐어 주었습니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아들들에게 헌신을 다했습니다. 만지면 부서질까, 바람 불면 날아갈까. 나무라는 말 한마디, 매 한 번 드는 일 없이, 아들들이 하는 거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적인 믿음을 주던 어머니였죠. 그래서 그 아들들 역시 어머니 일이라면 여섯 아들 모두 모든 것 다 제치고 뛰어나갈 정도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극진했습니다. 쌀이 떨어져 몇 마지기 논을 판 것을 두고두고 마음 아파하는 어머니를 위해, 세월이 흘러 아들들이 팔았던 논을 다시 되사서 어머니께 드리기도 할 정도였죠.


그런 그녀를 며느리들은 못마땅하게 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슨 일이 생겨도 내 아들 말만 옳다는 사람인데, 그들에게 불만이 안 생길 수가 없었죠. "네 할머니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아유, 네 할머니 고집 정말 알아줘야 돼." 어머니도 제게 늘 이런 말을 하시곤 했었죠. 그래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 누가 뭐라 해도, 내 아들 내 손자가 그녀에겐 언제나 인생의 최우선 순위였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이런 그녀의 삶에 결코 잊을 수 없는 큰 아픔이 찾아왔습니다. 그녀가 여든을 몇 해 앞둔 어느 해 겨울, 그녀의 둘째 아들이 죽었습니다. 여섯 아들 중에서도 가장 그녀에게 살가웠던, 형제들끼리 분란이 있을 때마다 늘 나서서 중재하며 화해를 이끌던 가장 사랑스럽던 둘째 아들이, 갑작스러운 병으로 그만 세상을 등지고 만 것이었습니다. 내가 찾아갈 때마다 그녀는 가슴이 뚫려 버린 것 같다며 눈물을 펑펑 쏟았고, 아빠는 좋은 사람이었다고, 하늘에서 너를 꼭 도와줄 거라는 말만 계속 반복하였습니다. 그녀의 눈물은 구십 노인이 되어서도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오히려 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문 상처를 계속 후벼파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기까지 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에게 치매가 왔습니다. 그가 돌아가시기 몇 년 전이었죠. 평생을 옥편을 뒤지고 문중 일이 전부였던 서생 같던 그는, 치매가 왔지만 그저 기억이 희미해질 뿐 소란을 피우거나 난동을 부리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젊었을 때의 기억이 그를 아프게 한 모양입니다. 워낙에 모든 이에게 친절하고 인기가 좋았던 그녀가, 그는 못내 못마땅했나 봅니다. 그가 그 시절 기억으로 돌아갈 때면, 생전 안 하던 욕까지 하며 그녀를 힘들게 하기도 했었죠. "느그 하나씨가 미쳤는갑다" 하며 그녀는 속상해했지만, 그래도 아침 낮 밤으로 정성을 다해 그를 돌봤습니다. 힘이 부쳐 하루하루가 버거웠지만, 그래도 남편을 살폈습니다. 어머니까지 탈이 날까 아버지를 시설로 보내자는 아들들에 못 이겨 결국 남편을 요양원에 보내기도 했지만, 밤새 한잠을 못 잤다며, 이렇게는 못 살겠다며 보낸 지 하루 만에 다시 집으로 데려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남편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은 혼자가 된 그녀에게 또 다른 시련을 가져왔습니다. 일평생 총명했던 그녀의 기억이 점점 사그라지기 시작한 것이었어요. 하지만 줄어드는 기억만큼이나 그녀의 고집은 거세져 갔습니다. 그렇게 애지하던 아들들에게까지 짜증을 내는 일이 생겼습니다. 어느덧 노인이 되어버린 아들들은 그녀를 요양병원으로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녀의 전부였던 그들이, 그녀가 죽기보다 싫어하던 곳으로 그녀를 데려 갔습니다. 병원 침대에서 초점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모습에 내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몇 년 뒤, 나는 타국에서 그녀의 부고를 들었습니다.


파란만장(波瀾萬丈)은 생활이 여러 가지 시련이 많고 변화가 심하다는 뜻입니다. 왜정과 전쟁을 겪고, 사랑하는 아들과 남편을 가슴에 묻고, 총명했던 기억을 모두 잃은 채 쓸쓸히 생을 마감한 그녀의 일백 년 삶. 아침마다 머리를 곱게 빗고, 은빛 비녀로 쪽진 머리를 하던 내 할머니가 그립습니다.


P'aranmanjang — a life tossed by waves ten thousand fathoms deep. This essay is a grandson's tribute to a grandmother born in 1920s colonial Korea, who outlived Japanese occupation, war, the death of her most beloved son, and finally her own memory. Through the lens of this Korean expression for a turbulent, trial-filled life, the writer traces the arc of a woman who gave everything to her sons, cared for a husband through dementia, and spent her final years in a nursing home she had always dreaded. The essay closes with a quiet, aching image: a silver hairpin, a neat bun, a grandmother mis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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